<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캉텡 두피우 2022
*스포일러 포함
새로운 집을 산 알랭(알랭 샤바)과 마리(레아 드뤼케르) 부부는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독특한 이야기를 듣는다. 집 지하실에 있는 구멍으로 내려가면 무언가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그를 따라 구멍으로 내려간 부부는 집의 2층으로 내려온 자신을 보고 놀라워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구멍을 내려갈 때마다 12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3일 젊어진다는 사실이다. 알랭은 젊었을 적의 꿈을 위해 구멍을 욕망하는 마리와 다툼을 이어가고, 그러던 와중 집들이에 놀러 온 직장상사 제라르(브누아 마지멜)와 잔(아나이스 드무스티에) 커플도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디어 스킨>과 <주둥이들> 등 기상천외한 설정의 코미디를 만들어 온 캉텡 두피우 감독은 이번에도 독특한 이야기를 가져왔다. 사실 시간의 흐름, 특히 젊음을 욕망하는 이야기는 여럿 있었지만,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는 그것을 더욱 독특한 방식으로 밀어붙인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편집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선형적인 플롯과 전개를 보여주지만, 각 장면의 배치는 비선형적인 방식을 취한다. 시간상 영화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장면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플롯을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그 안에서 장면들을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매치컷을 통해 뒤섞어 놓았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그것은 이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 같은 영화처럼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러한 편집은 대출이나 직장 등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구멍에 들어가길 꺼리는 알랭과 다르게 항상 구멍을 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은 마리의 서로 다른 시차(時差)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구멍 바깥에서 알랭이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마리는 구멍이 제공하는 12시간의 공백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한 시차는 영화 초반부의 코미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만 이 흥미로움은 제라르의 등장과 함께 사그라든다. 알랭과 마리 부부의 집에 초대받은 제라르와 잔은 갑작스러운 고백을 한다. 제라르가 자신의 ‘고추’를 떼어내고 ‘전자 고추’를 달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적어도 성기의 기능만큼은 회춘한 제라르는 그 또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전자 고추’가 충격을 받아 고장나자, 그는 회사의 계약을 알랭에게 떠넘기고 재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향한다. 마리가 끝없이 구멍으로 들어가며 모델의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것처럼, 제라르는 거액의 돈을 주고 되찾은 정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영화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모든 욕망 바깥에 있는 것 같은 알랭이다. 화가 난 마리의 대사에 의하면 “고추가 쳐진” 알랭은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 보인다. 사사건건 전화를 걸어 그를 괴롭히는 클라이언트와 계약을 돕지 않는 제라르, 자신을 내팽개치고 회춘에만 집중하는 마리에게 화가 나 있을 뿐이다. 사실 영화의 도입부, 알랭이 집을 매입하는 순간 그의 욕망은 이미 달성된 것이다. 클라이언트나 나쁜 상사를 상대하는 일은 그에게 이미 욕망이 달성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들일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알랭은 욕망에 휩싸인 주변인들 사이에 놓여 있다.
마리와 제라르는 비슷한 욕망을 지녔다. 마리는 젊은 모습으로 돌아가 모델이 되길 욕망하고, 제라르는 자신의 고추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섹스의 화신이 되고 싶어 한다. 이 모든 것은 젊음이라는, 누구나 거쳐가지만 모두가 소유할 수는 없는 순간과 연관된다. 이 영화의 독특한 편집방식은 여기서 기인할테다. 다만 이 영화는 구멍이 제시하는 시차를 사실상 설정의 영역에 머무르도록 방치한다. 마리가 20대의 외모에 가까워질 때까지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알랭이 그만큼의 시간을 보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신비한 구멍이 만들어낸 시차가 서로의 욕망이 다름에 따른 시차(視差)로 변화하지만, 이 영화의 비선형적인 편집은 그것을 흥미롭게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때문에 알랭, 마리, 제라르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 후반부의 몽타주는 일종의 수사학적 반칙이다. 욕망 속에서 무너지는 마리와 제라르, 이미 욕망을 넘어선 알랭이 각각 보여주는 각자의 말년은, 바흐의 관현악을 더욱 가볍게 연주하는 신디사이저 음악과 함께 서로 다른 욕망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들 각자가 맞이하는 일종의 파국 혹은 평화는, 이 코미디를 흥미로운 도덕극보다는 다소 지루한 교훈극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