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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11. 2023

좋은 이웃 되기

<드림팰리스> 가성문 2022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은 뭘까? 모두가 입을 모아 이웃 간 소통이 단절된 시기라고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에 관심이 많다. 층간소음이나 담배냄새 같은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문제부터, 집값, 전세사기, 임대아파트 차별…. 이웃에 관한 지금의 관심은 구별짓기에서 비롯된다. 나의 집을 침범하는 소음과 냄새에 관한 것부터, 다른 계급, 직종, 국적, 인종, 종교의 이들이 나의 이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까지, ‘집’은 나와 이웃을 구별짓는 수단이 되었다. 단순한 자본의 욕망을 넘어, 집으로 대표되는 구별짓기의 욕망은 일종의 행동양식이다. <드림팰리스>는 그 속에 놓인 인물의 이야기다. 혜정(김선영)은 산재로 사망한 남편의 합의금을 통해 ‘드림팰리스’에 입주한다. 함께 투쟁하던 수인(이윤지)과 고3 아들 동욱(최민영)은 그러한 혜정에게 반감을 보인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서 녹물이 나오고,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입주민 회의의 동의가 필요하며, 입주민 회의는 미분양 상태인 아파트의 집값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혜정은 분명 자신과 주변인을 위한 선택을 이어가지만, 그의 정교하지 못한 선의는 구별짓기의 욕망의 먹잇감이 된다.     

 혜정의 선택은 번번이 실패한다. 혜정의 남편은 원청 직원이었고 다른 산재 사망자들은 하청업체 직원이었다. 그들은 함께 천막농성을 벌이지만 좁혀지지 않는 간극 속에서 혜정은 눈치를 보게 된다. 합의는 거기서 비롯된 선택이다. 지금이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고3인 동욱을 돕고자 한다. 모종의 사건으로 수인이 수감되자, 그는 수인의 두 자녀를 돌본다. 그는 출소한 수인에게 자신의 소개로 드림팰리스를 계약하면 저렴하게 집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 권유하지만, 이는 입주민 회의와 수인 양쪽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자신의 안정과 타인에 대한 선의로 결정된 혜정의 선택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자신을 나누는 무수한 셈법에 따라 최악의 결과로 귀결된다. 혜정의 선택들은 구별짓기 욕망에 기반한 민주주의도, 정보가 제한된 상태의 연대도 결국 실패함을 보여준다. 혜정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그가 시위를 이어갔다면 기업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을까? 수인에게 드림팰리스 입주를 권하지 않았다면 모두를 분노케 하는 상황은 등장하지 않았을까? 영화가 보여주는 방향과 다를지라도, 우리는 무수한 갈래의 최악을 상상할 수 있다. 설령 혜정이 드림팰리스에 입주하는 대신 다른 지역으로 떠나 새출발하는 선택을 했더라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됐을지도 모른다.      

 혜정을 둘러싼 문제 속 실제 권력들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산재를 일으킨 기업의 임원은 물론 말단직원마저 영화에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추지 않는다. 드림팰리스를 분양하는 업체의 본부장(김태훈)이 등장하지만, 그 또한 텅 빈 모델하우스의 자리를 지키는 하수인 중 한 명일 뿐이다. 입주민 회의는 보이지 않는 회사를 상대하는 대신 당장 집값을 추락시킬 행위와 사람들을 공격한다. 산재 유가족들은 산재 사고 발생 당시의 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함에도, 원청-하청이라는 일반적인 구별짓기 구도에 따라 혜정과 수인을 판단한다. 정작 그 정보를 제공하지 않던 것은 기업이지만 말이다. <드림팰리스>가 그려내는 상황은 모든 개인을 피해자이며 가해자로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여전히 비가시화된 대상, 혹은 본성 자체가 추상적이기에 그 실체는 건물이나 말단직원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대상들은 각자도생의 천박함을 알리바이로 내세우며 자신의 책임을 전가한다. <드림팰리스>는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불행을 혜정의 삶에 기입하며 이 구조를 보여주려 한다. "좋은 이웃 되기"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이 세계의 입주자에게 부여하는 구조 말이다.

 이 지점은 <드림팰리스>의 성공적인 부분임과 동시에 다소 간과된 부분이다. 혜정은 굉장히 복잡한 결을 지닌 인물이다. 김선영의 놀라운 연기는 초 단위로 캐릭터가 지닌 스펙트럼의 변화를 얼굴 위에 펼쳐낸다. 이 영화는 그러한 얼굴에 최대한 기대어 간다. 자신에게 실망한 수인을 마주할 때, 동욱이 숨겨온 비밀을 고백할 때, 입주민 회의의 집회에서 벌어진 사고를 목격할 때, 유가족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던 본부장에게 녹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눌 때, 혜정/김선영의 얼굴은 한 가지 가면을 쓰고서는 그 존재가 성립할 수 없는 현대인의 표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마치 영화 속 ‘기업’들이 그러한 것처럼, 혜정에게 주어진 정보를 통제하며 그를 점점 수렁으로 끌고 간다. 그의 선의는 이 세계에서 작동할 수 없다. 영화는 그러한 세계에 혜정을 놓고 그의 리액션을 하나의 생산물로 가져온다. 이 영화는 자신이 지적하려는 구조를 일정 부분 답습한다. 그것을 스크린에 현현케 하는 김선영의 얼굴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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