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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1. 2023

내파하는 삶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2023

*스포일러 포함    

 

 시공간을 배열하는 방식에 관한 실험으로 점철된 그의 필모그래피는 <덩케르크>에서 한 차례 정점을 맞이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세 개의 계열로 구분된 시공간은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메멘토>에서 <인셉션>, <인터스텔라>에 이르는 작품들은 한 명의 프로타고니스트를 내세워 뒤죽박죽 섞인 시공간을 헤집고 나아가는 구조를 선보였으며, <테넷>은 그 구조를 명확한 방식으로, 심지어 ‘프로타고니스트’라는 인물을 주인공 삼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그러한 구조가 작동할 수 없는 작품이다. 놀란이 다시 한번 2차 세계대전 시기를 소재 삼은 작품이지만, <덩케르크>가 무명의 병사들을 내세워 단일한 주인공을 배제했다면 <오펜하이머>는 그 제목부터 <오펜하이머>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시점은 컬러로,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시점은 흑백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가 뒤섞는 것은 시간보다는 시점이다. 물론 캐임브리지 유학 시기부터 트리니티 핵실험, 1954년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 1959년 스트로드의 청문회 등 세 개의 타임라인이 교차되며 등장하긴 하지만, 전작들처럼 한 시점에서 여러 타임라인이 교차한다던가 시간을 되돌리는 기술은 불가능할뿐더러, 전기영화라는 형식 안에서 무의미하다.      

 그래서 놀란은 전작들과 다소 다른 방식을 도입한다. <오펜하이머>는 원작인 카이 버드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충실하다. 평전은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유년기부터 시간순으로 서술한다. 놀란은 그러한 순서를 택하진 않았다. 앞서 언급한 세 개의 시간대는 영화 속에서 교차되며 등장한다. 다만 오펜하이머의 청년기부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이후까지를 다루는 부분만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간다. 두 개의 청문회가 사이에 끼어들며 이야기를 교란하는 것만 같지만, 각각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1인칭으로 등장하는 지나간 시간에 관해 사후적인 설명을 더해줄 뿐이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라는, 대립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놀란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 <오펜하이머>는 <인터스텔라>처럼 과학적 설명과 묘사를 중점에 두지 않는다. 재래식 폭탄으로 트리니티 핵실험을 재현했다는 트리비아는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삶의 궤적, 코스모폴리탄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던 당대의 지식인들이 양차대전을 비롯한 거시적 세계사의 맥락에서 선택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물 묘사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다. 공산당에 가입하진 않았으나 학내 노조 설립을 돕는 모습이라던가, 당원으로 활동하거나 활동했던 주변인들, 가령 동생 프랭크(딜런 아놀드), 연인 진(플로렌스 퓨),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 등과의 연관성은 영화 내내 화두에 오른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 또한 오펜하이머와의 첫 만남에서 그러한 지점들을 지적한다. 스트로스를 비롯해 니콜스(데인 드한), 패시(케이시 애플렉) 등 미군의 인사들 또한 오펜하이머와 공산당의 연관성을 찾아내려 한다. 영화에 언급되고 등장하는 무수한 과학자들은 각자의 국적과 민족구성에 따라 애국심, 변절, 배신, 충성을 강요받는다. 오펜하이머는 그중에서도 가장 폭넓은 변화를 보여주는, 2차대전을 종결시킨 무기를 개발한 사람이자 매카시즘의 희생자이면서도, 자신이 지닌 정치적 입장과 신념을 정확히 표현하는데 반복하여 실패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놀란은 이를 일장연설의 대사로 표현하는 대신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경유해 드러내려 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오펜하이머는 원자들이 서로 부딪쳐 쪼개지고 폭발하는 꿈 내지는 환상을 본다. (IMAX 환경에서) 2.20:1과 1.43;1을 오가는 화면비 변화는, IMAX 영화들이 으레 그러한 것처럼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사용되기보단 오펜하이머의 내면에 접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잠자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을 보여주는 2.20:1 화면비와 그가 보았을 환상을 보여주는 1.43:1의 IMAX 화면비가 교차되는 장면은, 그가 꾸었을 꿈을 관객에게도 경험케 하고자 하려는 시도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스펙터클, 비행기를 부수고 도시를 접으며 블랙홀을 스크린에 그려냈던 것과 같은 이미지가 없다. <덩케르크>처럼 전장이 묘사되는 것도 아니다. 러닝타임 2시간 가량에 등장하는 트리니티 핵실험이 이 영화의 유일한 ‘큰 장면’일 것이다. 뒤집히고 왜곡되는 세계, 서로 다른 시공간이 한 지점에서 접합하는 광경을 보여주던 놀란은 <오펜하이머>에서 담백하게 화면을 꾸린다. 마치 <메멘토>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메멘토>의 유일한 스펙터클은 가이 피어스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이었다. <메멘토>가 그랬던 것처럼, <오펜하이머>의 중심은 오펜하이머의 얼굴이다. 점차 주름이 짙어지고, 갈 곳을 잃은 듯한 흔들리는 눈동자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핵실험을 목격하며 순수한 경이에 빠지기도 하고, 정치적 입장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서는 긴장과 당황이 얼굴 자체에서 드러난다. 다만 킬리언 머피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그의 내면을 경유해내는 데 실패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을 거쳐 냉전의 도입으로 향하는 과정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에서 점차 정치인이 된다. 자신의 상념을 부정하는 연설을 해야하고, 증인들을 모아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그는 과학과 기술의 성취가 그에게 가져다준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스트로스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흑백 장면들이다. 오펜하이머의 시점이 컬러로 표현되는 것과는 반대로, 스트로스의 시점은 세상을 흑백논리로 구분하려는 그의 행보를 연상시키는 흑백으로 표현된다. 그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장면들은 종전 이후 오펜하이머가 겪은 고초의 원인을 보여준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던 청문회의 기억을 가지고 그를 공격한다. 그가 비공개 청문회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이 하나하나 난도질당하게끔 상황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오펜하이머가 경험한 시간에 대한 사족에 불과하다. 그의 청년시절부터 종전 이후까지의 행적에 관한 주석은 오펜하이머가 경험하는 비공개 청문회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전후 오펜하이머가 겪은 고초의 흑막으로 스트로스를 제시하는 이 영화의 구성은, 도리어 오펜하이머에게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1930~50년대 미국 정치사를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내보려는 시도는 스트로스라는 안타고니스트의 존재로 인해 분산된다. 단순히 J. 에드가 후버나 트루먼 대통령처럼 영화 속에 언급만되거나 짧게 등장하는 것만으로 오펜하이머의 행적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을 떠올려보자. 역사적 인물에 관한 평전은 해당 인물에 관한 전기임과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기를 서술한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경유해 미국 정치사를 그려낸다. 핵실험 이후 오펜하이머가 걱정하던 군비 경쟁이라는 연쇄반응은 현실이 되었으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여러 전쟁의 양상을 통해 물질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놀란은 <오펜하이머>가 동시대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길 바랬을 것이며, 그러한 독해 또한 여럿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결국 오펜하이머가 고민하던 주제를 단순히 스트로스라는 한 인물의 악행으로 축소한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에게 우회적인 지지를 보낸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관한 해석이라기보단, 그와 같이 고민하는 인물의 부재를 걱정하고 있다는 소심한 리버럴의 메시지일 뿐이다. 이상한 방식으로 월가 점령 시위를 비난했던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처럼,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과거를 비판하며 원론적인 입장에서의 윤리를 반복해서 설파하고 있을 뿐이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삶에서 퍼올릴 수 있는 풍요로운 논쟁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를 흑백논리 안에 가둬버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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