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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24. 2023

애매한 삶의 불안감

<쇼잉 업> 켈리 라이카트 2022

 어떤 영화는 자신이 가진 것을 쉬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오레건의 아름다운 풍경도, 예술에 관한 치열한 고민도, 어딘가 갈등이 있는 듯한 가족의 과거도 이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자신이 어떤 영화인지를 철저히 숨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예술에 관한, 가족에 관한, 직업에 관한, 일상에 관한, 친구에 관한, 동물에 관한 것임과 동시에 그것을 벗어난다. 영화는 종종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카메라 같은 필치로 예술학교의 학생들을 관찰한다. 도예, 조각, 회화, 섬유공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품을 생산하는 학생들, 카메라는 얼핏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맹렬한 그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예술학교에 일상에 불안감을 도입하는 것은 리지(미셸 윌리암스)의 존재 자체다. 아니, 영화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다분히 평화로운 일상은, ‘리지’라는 개인에게 집중하자 미묘한 투쟁의 장으로 변화한다.     

 이 투쟁의 장은 사실 보잘것없다. 학교 동기이자 작가인 집주인은 고장 난 온수기를 고쳐주지 않을 뿐더러, 우연히 구조한 비둘기를 제대로 돌보지도 않으면서 리지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한다. 각각 예술가인 가족들은 각자의 생활영역에서 스치며 서로의 삶의 가볍지 않은 파문을 남긴다. 예술적 작업에 관한 고민은 드러나지는 대신 일상적 상황들 속에 갉아 먹힌다. 리지는 완전히 자리 잡은 작가가 아니다. 어쩌면 그의 사정은 예술학교의 다른 학생들보다 나아 보인다. 아버지는 도예를 하던 예술가고, 어머니는 학교 행정실에서 일한다. 자신도 어머니를 따라 행정실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린다. 예술적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학교에 새로 부임한 강사는 그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한다. 집주인으로 있는 친구의 집은 리지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수리한 것으로, 그 덕분에 값싼 월세로 살아간다. 이 영화는 리지의 예술적 실천, 작가적 열망, 그것을 얻기 위한 쟁투를 담아내려 하지 않는다. 예술, 가족, 친구, 생계, 동물, 모든 것은 비슷한 비중으로 리지의 삶 속에서 다뤄진다. 그러니까 이 애매한 정도의 삶,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해나가고 있는 삶, 프로라기엔 부족하지만 아마추어라 불리기엔 인정받는 시기, 어쩌면 예술과 연관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중간단계가 이 영화의 중핵이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은 그 고양이가 공격했던 비둘기를 쓰다듬는 손이 된다. 핸드빌딩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던 손은 행정실의 컴퓨터로 사무를 보는 손이 된다. 리지의 몸, 특히 리지의 손은 그가 일상을 영위하는 방식이자 삶을 둘러싼 불안감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감각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라이카트에 따르면 <쇼잉 업>은 “천재라는 개념을 해체하는(deconstructs the idea of a genius)” 영화다. 리지의 개인전 오프닝에 온 아버지는 자신이 영감을 받는 순간을 떠벌리지만, 그곳에 전시된 리지의 작품들은 하루하루 일상을 견뎌내며 연마된 기술의 결과물이다. 예술가가 예술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담아내던,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노동을 하는 예술가들을 어딘가 안쓰럽게 바라보던 시선들을 이 영화는 해체한다. 라이카트의 영화적 여정, 정착과 떠돎, 연대를 바라며 내미는 손길, 사랑과 우정이 노동과 맺는 관계를 이야기해온 라이카트는 이번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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