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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02. 2023

없던 세계와의 근접조우

<어파이어> 크리스티안 페촐트 2023

  물, 불, 흙을 테마로 삼는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어파이어>는 전작 <운디네>의 정반대에 놓인 것만 같다. <운디네>는 운디네 설화를 통해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소위 ‘역사 3부작’(개인적으로는 안티-파시즘 3부작이라 부르고 싶은)이라 불리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의 자장에 속해 있다. <운디네>는 갑자기 세계의 부재를 겪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그 세계는 운디네라는 인물 자체다. 산업 잠수부인 그에게 운디네(물)은 그 자체로 세계이며 사랑이자 역사다. 수족관이 터지며 물을 뒤집어쓴 두 사람은 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물속에서 사랑의 역사를 발견하며 또한 써내려간다. 운디네의 실종은 그에게 세계의 부재 그 자체다. <어파이어>는?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별장에 소설을 퇴고하러 온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에게 세계는 이미 부재하다. 그는 친구 펠릭스는 물론, 별장에 이미 머물고 있던 나디아(파울라 비어)나 그곳에서 알게 된 인명구조원 데비트(에노 트렙스)처럼 지금을 살아가지 못한다. 그의 모든 정신은 그가 붙잡고 있는 소설 『클럽 샌드위치』에 머물러 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음이자 시야 바깥의 것이다. 직업적인 것, 혹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요리, 집수리, (여가로서의) 수영 등 모든 것이 일이라고 말하는 펠릭스는 노동과 그 밖의 것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 것만 같다. 호텔 아이스크림 판매원으로 일하며 매일 호텔 식당의 남은 음식을 싸오는 나디아도 마찬가지이며,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며 레온 일행을 만나는 데비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 눈앞에 놓여 있는, 그들의 발로 향할 수 있는 세계에 충실하다. 이는 단순히 여름 바캉스 기간에만 가능한 일탈적 순간은 아니다. 나디아와 데비트는 일하고 있고, 펠릭스 또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별장에 왔다.      

 ‘카르페 디엠’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일하는 공간과 순간은 삶과 구별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골몰하는 만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자신의 감각을 뻗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레온은 이를 거부한다. 영화 내내 레온에게만 등장하는,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단절을 불러일으키는 점프컷들은 레온이 내세우고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셋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의 시간은 다른 이들의 시간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자꾸만 시간이 늦었다고 말하는 레온, 자꾸만 잠들어 일하지 못하는 레온, 자꾸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레온, 자꾸만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레온. 영화는 종종 레온의 시점숏으로 다른 이들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관객에게는 작은 소리로 들려와 대화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만, 레온은 그것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화의 내용을 멋대로 곡해한다. 자신에 관한 뒷담화나 자신의 커리어를 망치는 방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고 듣고 읽어낼 줄 모른다. 그를 찾아온 출판사 사장은 그의 원고를 그에게 읽어준다. 원고를 읽는 내내 레온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어처구니없는 문장들의 연속인 원고를 듣는 관객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그의 소설 『클럽 샌드위치』는 세계를 관찰하길, 아니 세계를 대면하길 포기한 소설가의 졸작이다. 레온도 이를 알고 있지만, 이를 ‘자각’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부재상태로 내몰며 창작하지만, 결국 세계가 부재한 창작은 공허할 따름이다.      

 때문에 <어파이어>는 스스로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머저리가 그곳을 잠시 빠져나왔다가도 이내 제 발로 뛰어드는 이야기의 반복이다. 타인이 자신을 몰래 흉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타인을 흉보고 있던 것은 레온 자신이었다. 타인이 살아가는 일상이 생산적이지 않으며 무가치한 여가나 저급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하게 무의미한 글자 덩어리를 생산한 것은 레온 자신이었다. <어파이어>의 도입부는 얼핏 미국의 청춘 호러영화 같다. 청년들이 자동차를 타고 외딴 별장으로 향하고, 자동차가 고장 나 숲길을 걸어간다. 저 멀리서 불타오르는 산불은 보이지 않는 괴물처럼 그들의 시야 저 멀리에 존재한다. 심지어 그것은 아름다운 석양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호러영화처럼 그들이 고립된 상태인 것은 아니다. 다만 레온의 상황만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숲 속의 오두막에 투신한 채 괴물을 기다리는 바보나 다름없다. 그렇게 별장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산불이 6월의 함박눈으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마침내 별장 인근에 도달하여 살갗의 열기로 느껴질 때, 그제야 레온은 자신 주변을 돌아본다. 물론 별장이라는 극소세계는 흩어지고, 파괴되었으며, 그의 소설처럼 공허가 된 이후다. 레온은 그때가 돼서야 자신의 글에 세계를 맞대어 본다. 미지와 대면한 뒤 살아남은 호러영화의 마지막 생존자가 영화의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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