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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5. 2023

착실히 누적되는 불안

<잠> 유재선 2023

*스포일러 포함


 몽유병을 소재로 삼은, 더 나아가 몽유병을 앓는 이의 인격이 잠들기 전과 달라져 벌어지는 상황을 호러의 소재로 사용하는 작품은 종종 있어 왔다. 유재선의 데뷔작 <잠>도 그렇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처럼, 현수(이선균)는 잠이 들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그가 다른 이로 일어난다는 지점이 사뭇 흥미롭게 다가오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잠>의 중요한 모티프는 아니다. <잠>에서 현수가 ‘배우’로서 겪는 일들은 몽유병 증상으로 인해 상해를 입으며 배우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는 것 정도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현수보다는 아내 수진(정유미)의 변화다.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 속에서, 1장의 수진은 만삭의 임산부고, 2장과 3장에서는 신생아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현수의 몽유병을 견디며 변화하는 수진의 모습은 정유미의 전작 <82년생 김지영>에서 다른 여성들에게 빙의되었던 모습을 얼핏 연상시킨다.

 1장과 2장은 수진의 관점을 쫓는다. 밤중에 일어나 날고기와 날계란을 씹어먹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 하며 피가 날 때까지 얼굴을 긁어대는 현수의 모습을 보며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수진의 모습이 그 자체로 공포감의 소재가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기에, 벌어질 수 있는 사고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수진의 노력은 더 큰 불안을 야기할 뿐이다. 엄마가 데려온 무당 해궁 할매(김금순)는 현수에게 귀신이 붙었다는 진단을 내린다. 무당을 극구 거부하던 수진은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잠>은 현수의 몽유병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의 나열, 혹은 그것들이 제시하는 소름끼치는 사건들의 일회적 효과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많은 호러영화가 단순히 순간적인 놀람, 점프스케어를 통해 무서움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잠>은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배열한다. 이를테면 무당을 거절하던 수진이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 계기, 동시에 (현수는 보지 못했지만 관객은 본) 침대 밑의 부적을 현수가 발견하는 장면 같은 것을 떠올려보자. 현수의 몽유병이라는 사태는 해결되지 않고, 부적의 발견은 사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순간이 된다. 이는 몽유병으로 인해 발생한 수진과 현수 부부의 불안감, 그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다른 것을 택하며 스크린 바깥까지 그 불안을 전염시키는 방식은 다소 일회적으로 느껴지는 기능적 장면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영화는 귀신의 존재를 영화의 마지막까지 명확히 드러내지 않지만, 그것을 믿을 것인가의 선택을 관객에게 넘긴다. 현수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3장은 수진의 폭주를 다룬다. 잠든 현수를 두고 굿을 벌였다던가, 집을 부적으로 도배하며 현수에 들렸다고 파악한 귀신을 쫓아내려 하는 모습, 유머와 불안감이 뒤섞인 프레젠테이션 장면 등은 앞선 두 장과 다른 방식으로 수진의 불안감을 발산한다. 수진의 프레젠테이션 장면이 다소 코믹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앞선 두 장에서 쌓아온 불안감이 터져 나오며 충분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물론 이 부분에서 ‘개연성의 결여’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날짜를 계산하여 현수에게 귀신들림의 논리적 근거를 설명하지만, 그것은 얼핏 앞서 쌓아온 현실적인 공포와 불안을 흐트러트리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다만 아파트라는 지극히 현실적 공간에서 군더더기 없이 공포와 불안을 쌓아온 과정은 약간의 개연성 결핍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다. 더불어 수진과 함께 폭주하는 영화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 3장에서 벌어지는 장르적 전환은 <잠>이 쌓아온 분위기를 해친다기보단 영화 자체를 풍성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수진이 경험하는 불안은 현수의 몽유병과 귀신에 국한된 것 이상으로, 출산과 육아에 결부하여 읽을 수도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타인의 결합, 즉 결혼 자체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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