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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9. 2023

'바비 인형'의 역사에 관해

<바비> 그레타 거윅 2023

 *스포일러 포함     


 장난감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이 처한 난관은 이야기다. 많은 장난감은 이야기가 없다. 하스브로의 영화들, <트랜스포머> 시리즈, <G. I. Joe> 시리즈 등은 장난감을 기반으로 개별적인 이야기를 지닌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있었기에 차라리 사정이 나았다. 물론 <배틀쉽>처럼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던 장난감에 이야기를 부여하려다 개성 없는 영화가 나온 예도 있지만. 물론 <레고 무비>처럼 무수한 IP를 동원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이는 레고 특유의 열린 구성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바비>는? 마텔의 인형 바비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트랜스포머>나 <G. I. Joe>처럼 개별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 아니었다. 전래동화나 신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바비를 내세웠을 뿐이다. 무수한 종류의 바비 인형이 존재하지만 이들을 묶어주는 이야기는 없다. 장난감의 차원에서 그것은 필요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아예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비 인형 시리즈에는 바비뿐 아니라 남자친구 켄, 여동생 스키퍼, 남동생 토드, 임산부 인형인 밋지 등 다양한 주변인물이 존재한다. 마텔은 2005년 바비와 켄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가, 2006년 다시금 재결합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야기라기보단 설정에 가깝다. 켄, 스키퍼, 토드, 밋지 등은 ‘바비’라는 존재가 외롭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별다른 퀘스트도 주지 않지만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RPG 게임의 NPC들 같은 존재다.      

 <바비> 속 바비랜드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가 있고, 대통령, 의사,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바비들이 함께 살아간다. 물론 아이가 가지고 놀다 망가트린 ‘다리가 찢어지는’ 바비(케이트 맥키넌)도 존재한다. 켄은 그냥 켄이다. 켄(라이언 고슬링)이건 켄(시무 리우)이건 그들은 그저 켄이다. 완벽한 하루를 살아가던 바비는 어느 날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셀룰라이트가 생기고, 발이 평평해진다. 그러한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가지고 놀던 소녀를 찾기 위해 현실 세계로 향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얼핏 <토이 스토리 4>의 이야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바비>는 이야기를 독특한 방향으로 섭외한다. 바비 인형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그 인형이 겪어온 역사를 이야기에 끌어들인다. 거칠게 말해서, <바비>는 바비 인형을 둘러싼 역사의 영화화에 가깝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유명한 장면을 패러디한 영화의 오프닝은 아기 인형을 가지고 놀던 소녀들이 바비의 등장으로 아기 인형을 부수고 집어던지는 모습을 담아낸다. 마텔의 창립자 루스 핸들러가 바비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50년대 소녀들을 위한 장난감은 아기 인형뿐이었다. 아기 인형은 여성을 돌봄의 영역에 한정 짓는다. 소녀들은 자신을 엄마로, 모성적 존재로 사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 인형은 여성을 재생산 영역에 묶어두는 가부장제적 프로파간다였다. 바비 인형은 출시 초기부터 다양한 직군의 바비로 등장한다. “바비 인형 같다”라는 진술은 바비의 탄생을 고려하면 꽤나 어긋난 말이기도 하다. 바비는 차라리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슬로건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바비>의 초반부가 묘사하듯, 다양한 직군, 다양한 인종의 바비는 소녀들이 다양한 모습을 꿈꿀 수 있게끔 롤모델을 제시하려는 의도 하게 제작되었다. 물론 다양한 상품이 등장하며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바비 인형의 ‘인간적’이며 ‘성적’인 측면들, 이를테면 젖꼭지나 성기의 재현 같은 것은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었다. 하지만 바비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의 상징이 된다. 바비 인형은 소녀들에게 “너희는 뭐든지 될 수 있어. 하지만 마르고 아름다워야 해”라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외모지상주의의 화신 같은 존재가 된다. 다양한 체형의 바비, 장애인 바비가 등장한 지금에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비 인형의 “예쁨”은 상품으로써 팔리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바비 인형의 메시지는 지극히 시장주의적 페미니즘에 입각한 것이었다.     

 <바비>의 초중반부는 자신을 가지고 놀던 소녀를 찾기 위한 바비와 그를 따라온 켄의 여정이다. 현실 세계로 나간 바비와 켄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바비는 현실의 복잡함을, 삶의 복잡성을 목격하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바비랜드에서 바비의 선택과 눈길 없이는 존재 의미를 찾지 못했던 켄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된 가부장제가 은밀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현실 세계를 목격하고 각성한다. 바비랜드로 돌아온 켄은 다른 켄들을 꼬드겨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다. 가부장제에 세뇌된 다른 바비들은 켄의 트로피 와이프 신세가 된다. 일종의 ‘이갈리아’ 같았던 바비랜드는 켄에 의해 역전된다. 켄이 세운 ‘켄덤(kendom)’은 철없는 미국 남자 대학생들의 사교클럽 같은 곳이 된다. 돌아온 바비는 변해버린 바비랜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가지고 놀던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와 힘을 합친다. 그런데 글로리아는 소녀가 아니다. 중학생 딸을 둔 중년 여성이다. 마텔 사의 비서인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배운 가부장제의 모순을 짚어주며 세뇌된 바비들을 해방시켜 준다. 그렇게 바비는 바비랜드를 되찾고, 변화한 바비들은 켄들에게 10% 정도의 사회활동을 허락해 준다. <바비>는 그렇게 전형적인 미러링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바비를 둘러싼, 일종의 문화전쟁의 역사와 닮았다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마텔의 경쟁사 하스브로는 바비의 성공에 대항하기 위해 G. I. Joe를 출시한다. 인형(doll) 대신 인형(figure)을 내세워 소년들을 공략한다. 군인이며 총기를 들고 다니고 호전적인 성격의 특수부대 인형은 큰 인기를 끌었다. 마치 가부장제를 배워 온 켄처럼, 하스브로의 인형은 바비가 장악한 장난감 인형 시장을 흔들어 놓는다. 60년이 넘는 바비 인형의 역사는 바비에 가해진 비판을 수용하고 새로운 바비를 출시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가슴이 강조된 초기 인형은 몇몇 부모들의 반발로 조정되었다. 임산부 인형인 밋지는 미성년자 임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생산중단되었다. 마텔은 바비가 컴퓨터에 무능한 것으로 묘사된 책을 출간한 뒤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지 컴퓨터 공학자 바비를 출시하기도 했다. <바비>는 마텔과 바비 인형이 지닌 비판과 수용의 역사를, 그것을 전기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바비랜드와 현실의 대비, 켄의 쿠데타를 통한 일종의 역-미러링을 통해 다룬다. 4의 벽을 깨는 내레이터(헬렌 미렌)의 존재, 마텔 본사와 사장(윌 패럴), 그리고 루스 핸들러의 등장은 <바비>의 이러한 지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바비>와 그레타 거윅의 야심 찬 시도는 성공했는가? <바비>는 분명 <레이디 버드>와 <작은 아씨들>, 혹은 그의 배우 커리어의 대표작인 <프란시스 하>나 <매기스 플랜>과 완전히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워너와 마텔이라는 대기업이 붙은, 장난감의 역사에서 가장 히트한 상품을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다. 그가 <바비>를, 바비 인형의 역사를 영화화하는 방식을 환영할 관객들은 충분히 존재할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코미디 장르를 내세웠음에도 <바비>는 그에 충분히 부합하지 못한다. 웃음을 주는 장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온라인상의 일차원적인 미러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레이터, 켄의 솔로곡, <몬티 파이튼>을 비롯한 무수한 오마주 등 다양한 형태의 영화적 도구들이 등장하지만 이렇다 할 타격감 없이 스쳐 지나간다. 무엇보다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의 미러링이 보여주는 여러 모순을, 그 복잡성을 탐구하는 대신 글로리아가 토해내듯 뱉는 대사로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바비 인형을 두고 벌어진 싸움의 역사는 대중적 목소리에 대한 시장의 대응이었으며, 마텔에게 페미니즘은 시장 확보와 안정화를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바비>가 의도치 않게 드러내는 것은 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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