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스포일러 포함
올해 환경영화제를 통해 고레에다의 다큐멘터리 세 편(<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오염은 어디로 갔는가>, <또 하나의 교육>)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가 후지 텔레비전의 <NOFIX> 시리즈의 일환으로 제작된 세 작품은 각각 복지, 환경, 교육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앞의 두 편은 익숙한 저널리즘의 방식을 따르고, <또 하나의 교육>은 조금 더 참여관찰에 가까운 방식을 취한다. 고레에다의 모든 다큐멘터리 작업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문제들은 그의 극영화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특히 <아무도 모른다>, <공기인형>,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브로커>처럼 소위 ‘사회파’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작품들에서 그러하다. 이 작품들이 어느 정도 저널리즘적인 ‘폭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생각해보자. 오즈의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 <걸어도 걸어도>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같은 영화들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옅게나마 묻어나온다.
<어느 가족>의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프랑스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던 그는 <괴물>을 통해서 5년 만에 ‘일본영화’로 복귀했다. 해외에서 제작된 그의 작품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은, 나아가 그의 방식이 그가 살아온 곳 바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이는 고레에다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괴물>은 그가 가장 익숙하게 다뤄온 공간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언급하는) 영화의 3부 구조는 하나의 시공간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오피스텔 건물의 화재를 중심으로 각각 사오리(안도 사쿠라),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시점을 취하는 영화는 결국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지에 관한 선택이다. ‘인물의 시점’이라는 것은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에 다름 아니다.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며 어딘가를 다쳐 집에 돌아오는 미나토를 보고 교사 호리에 의한 학교폭력을 의심하는 사오리의 시점, 그것이 학교라는 공간에 부재한 학부모의 입장에서 편집된 사실임을 드러내는 호리의 시점 속에서 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는 부재하다. 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여기가 <괴물>이 인물의 시점을 오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 다분히 수단적인 선택이었음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사오리와 호리의 이야기가 각자의 시점이 중심인 1부와 2부 이후에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3부가 미나토의 시점이기에 그렇다는 것은 하나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동일한 시공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과한 세 인물을 각자의 이야기에 격리시켜 버린 이 선택은 그들 사이에 화해 불가능한 간격을 만들어 놓는다. 이들 사이에 교환되는 이야기는 없으며, 그저 관객의 뇌라는 가상의 서버 위에 차근차근 쌓인 레이어로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관객 하나하나를 판관으로 위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각 부가 시작하는 순간 관객의 판정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너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안 들었지?”라고 꼬집는 것처럼 말이다.
고레에다의 적지 않은 영화들은 어떤 모순 속에 놓인다. 이를테면 <어느 가족>은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대안가족이라는 상상력을 펼쳐보려 하지만, 그것의 형태가 익숙한 정상가족의 것이어야 한다는 제도의 압박 안에 존재한다. (원작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부모됨’을 이야기함에도 ‘모’를 영화에서 지워낸다. 특히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이야기됨에도, 극 중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사건이 자매를 엮어냄에도, 어머니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뤄진다. 인간소외를 이야기하기 위해 대상화된 여성성을 동원하는 <공기인형>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괴물>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모순에 놓인다. 이를테면 교장(타나카 유코)의 대사,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고레에다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행복이 오로지 미나토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만의 것인 것처럼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그려낸다. 하나의 시공간에 놓였지만 각자의 ‘시점’ 속으로 격리된 인물들은 결과적으로 서로의 시점을, 서로가 경험한 세계의 다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영화의 3부 구성은 얼핏 세계의 복수성을 인정하는 것만 같지만, 그것은 단지 복수성을 보여줄 뿐 긍정하진 못한다.
<괴물>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영화는 무수히 많다. 같은 시간을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다루는 영화들은 같은 시공간을 새로운 시점으로 반복하여 덧칠하며 하나의 ‘사실’을 그려내려 한다. 그것이 아가사 크리스티풍의 추리물이거나 특정한 범죄를 추적하는 경찰극 같은 장르적 선택으로서 유효하다. <괴물>은 그러한 영화인가? 고레에다의 초기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는 <괴물>이 수행하고자 했던 전략을 선취하고 있다. 영화는 비슷한 시기 자살로 세상을 떠난 복지 행정가와 사각지대에 놓인 복지 수혜자를 다룬다. 엘리트 관료와 성노동자라는 상반된 사회적 지위를 지닌 두 인물의 삶을, 고레에다는 일본 복지제도의 형성과 쇠락이라는 큰 줄기 위에 엮어낸다. 여기서 그는 두 인물의 삶의 유사성–종전 즈음 태어나 전쟁고아가 된–을 중심으로 같은 시공간을 다르게 살아온 방식에 주목한다. 이는 ‘복지’라는 테마를 직접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복수성을 긍정함으로써 일본이라는 공통의 세계를 성찰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른다>와 같은 고레에다의 걸작은 그러한 성찰이 고레에다 특유의 저널리즘적 기능과 맞물려 가능했다.
<괴물>에는 그것이 부재한다. 사오리의 말처럼 ‘평범한 삶’이 지배 이데올로기인 ‘정상 사회’에서 비가시회된 청소년 퀴어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였다면, 이 영화는 사오리와 호리를 그것의 희생양 삼는다. 교장이 미나토와 함께 금관악기를 불며 만들어낸 불협화음을 통해 서사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었다면, 영화의 주된 동력이나 다름없던 두 인물은 구제의 기회를 얻지도 못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영화의 결말과 달리 <괴물>은 결국 단일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3부 구성은 그 세계를 오로지 아이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관객을 그 세계로 드리블해가기 위해서만 기능한다.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퀴어영화의 클리셰와도 같은 비극성에 세계일 뿐이다. 고레에다 영화의 인물들이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괴물> 또한 세계(들)에 대한 부정 속에서 자라난 비극의 주인공들을 비춰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