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스포일러 포함
쥐스틴 트리에의 두 전작, <빅토리아>와 <시빌>은 코미디를 중심에 둔 영화들이었다. (그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에이지 오브 패닉>은 관람하지 못했다) 각각 난처한 상황에 놓인 변호사와 심리치료사를 주인공 삼아, 나아가 난처함을 넘어 직업적 윤리나 통념이 일그러지는 상황 속으로 캐릭터를 전진시키며 발생하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코미디와 드라마의 동력으로 삼았다. <빅토리아>의 주인공은 친구의 변호를 맡으면서 과거의 의뢰인에게 집안일을 맡기며 기묘한 삼각관계를 만들어 낸다. <시빌>의 심리치료사는 자신이 치료사임에도 정신병적 문제를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우연히 유명 여성 배우의 상담사가 된 그는 스스로 꺼내지 못했던 정신적 문제들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것은 영화촬영장을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발현된다. <추락의 해부>의 주인공 산드라(산드라 휠러)는 작가다. 삶과 일상에서 길어 올린 소재들을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어느 날 그의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스)이 집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목격자는 시각장애인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과 안내견 스눕뿐이다. 단순한 사고로 보이지 않는 사건 속에서 산드라는 용의자로 지목된다.
151분의 러닝타임 대부분은 산드라의 재판이다. 용의자로 기소된 그는 변호사 친구 뱅상(스완 아를로)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진행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부부 사이의 갈등, 사고로 인해 시각장애인이 된 아들에 대한 부부의 죄책감, 작품활동을 두고 벌어진 갈등과 같은 것들이다. 사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추락의 해부>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는 요소가 아니다. 쥐스틴 트리에는 사뮈엘이 정말로 살해당한 것인지, 혹은 단순한 사고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뮈엘의 자살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드러난 사실과 드러나지 않은 사실, 혹은 제한적으로 드러난 사실들의 조합 속에서 ‘사뮈엘의 추락사’라는 사건이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단순 사고라기엔 이상한 위치에 묻어 있는 핏자국, 충돌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발견되지 않은 혈흔과 DNA 등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디오라마와 3D 모델링 등은 문자 그대로 추락의 과정을 ‘해부’한다. 물론 이는 해부 과정의 일부이자 도입부일 뿐이다. 사뮈엘의 스마트폰에서 발견된 부부싸움의 녹음본, 산드라의 소설 속 남편에 관한 묘사, 처음의 증언과 달라진 다니엘의 증언, 그리고 그 모든 것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변호하는 산드라의 말은 사뮈엘의 추락사라는 사건을 복수의 현실들로 분화시킨다.
‘해부’라는 행위는 대상의 속을 까발려 하나의 진실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무수한 법의학 영화와 드라마에서 봐왔던 것처럼, 일종의 해부라 할 수 있는 부검은 일차적이면서 최종적인 증거를 포착하는 기술에 가깝다. 하지만 <추락의 해부>가 보여주는 해부는 그 내용을 판정해야 하는 배심원과 판사 앞에서 단일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향하지 않는다. 해부된 내용들은 그저 하나의 현실을 주장하기 위한 단서일 뿐이다. 해부가 진행될수록 산드라, 사뮈엘, 다니엘, 스눕으로 구성된 가족의 현실은 복수화된다. 그것은 모든 재판이 끝난 이후에야, 각각의 가족구성원, 검사, 변호사, 언론 등이 제각기 주장하던 현실이 배심원과 판사에 의해 하나씩 기각되고 ‘무죄’라는 결론만이 남은 현실이 될 때에야 다시금 하나의 현실로 통합된다. 트리에의 전작들은 그러한 갈라짐 속에서 아이러니한 코미디를 끌어내고 한 명의 개인을 복합적인 대상으로 묘사해낸다.
<추락의 해부>는 이전과 같은 코미디의 방식은 아니지만, 법정 드라마라는 형식 속에서 유사한 과정을 수행한다. 다만 결과적으로 개인에 집중한 전작들과 달리 법정공방의 형식 속에서 대안적인 현실들이 생성되는 과정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트리에의 확장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라쇼몽>처럼, 이 영화는 진실을 제시하는 대신 진실‘들’을 제시한다. 물론 그것은 사건 자체를 보여주지 않은 영화의 선택에 따라. 재판 결과가 공개된 이후 산드라의 모습을 담은 에필로그를 따라 관객이라는 제4의 벽 바깥의 배심원들에 의해 새롭게 주장될 현실들로 재차 확장된다. <추락의 해부>는 영화 속 법정을 영화 바깥의 극장으로 확장한다. 관객은 산드라에 관해 무죄를 받아낸 진범이라 말할 수도, 사뮈엘이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못된 남편이라 받아들일 수도, 혹은 그저 이 모든 상황에 놓이게 된 다니엘의 처지에 공감하며 슬퍼할 수도 있다. 쥐스틴 트리에는 ‘진실’이라는 대상의 모호함을 해부하여 관객 앞에 내놓았지만, 그 모호함은 여전히 모호함으로 남는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처럼 명쾌한 정의도, 히치콕의 스릴러처럼 드러나는 진실로서의 배후사건도 이 영화엔 없다. 그저 자신이자 자신으로 구성된 존재로서 찢어진 개인과 그에 대한 해석으로 존재하는 현실들만이 영화 전체에 아른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