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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17. 2024

홀로 세상을 채워나가기

<여기는 아미코> 모리이 유스케 2022

 아미코(오사와 카나)라는 소녀가 있다. 생기발랄한 아미코는 엉뚱한 발상을 지녔다. 숙제를 하거나 학교에 나가는 것보다는 맨발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소년 노리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엄마 사유리(오노 미치코)와 대화할 때면 말에 집중하지 않고 턱에 있는 점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딘가 독특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아미코에게 맞춰주던 것은 오빠는 사춘기를 맞아 변하는 중이다. 그러던 중 사유리가 태중의 아이를 사산하게 되고, 엄마를 위해 ‘남동생의 묘’를 만들어 주려던 아미코의 행동은 가족을 깊은 어둠으로 집어 넣는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여기는 아미코>는 거의 모든 순간을 아미코의 시점으로 담아낸다. 얼핏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을 비롯해 아이들이 주인공인 익숙한 일본영화의 따스함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다만 <여기는 아미코>는 그러한 영화들이 으레 이면에 숨기고 있는 어둠을 조금 더 강하게 전면화한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사운드다. 이 영화의 소리들은 종종 화면을 앞지른다. 어딘가로 향하는 발소리, 풀밭과 나무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주족의 오토바이 소리와 같은 것들. 아미코는 자신의 방에서 유령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아빠 데츠로(이우라 아라타)는 그 말을 무시한다. 유산된 남동생의 묘를 만들어준다는 아미코의 행동이 사유리를 앓아눕게 만든 이후 아미코의 말들은 빈번하게 무시된다. 중학교에 올라갈 나이가 된 아미코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남동생의 묘’ 사건 이후로 데츠로는 불량소년이 되어가는 아미코의 오빠를 방치하고, 아미코는 더욱 혼자가 된다. “귀신은 무섭지 않아”라는 내용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아미코에게, 데츠로는 그저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는 말만을 건넨다. 이 영화의 소리들은 공간을 넘나들며, 화면 내부와 그 바깥을 오가며 아미코의 혼자됨을 강조한다. 이것은 ‘고독’과는 다르다.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는 아미코와 귀신들의 행진 뮤지컬 장면에 보여주는 것처럼, 아미코는 고독하다기보단 그저 홀로 있을 뿐이다. 평화로운 마을과 학교를 담아내는 수평 트래킹 숏들이 자아내는 따스함은 아미코의 ‘홀로 있음’에 의해 상쇄되고, 사마귀나 개구리 같은 작은 생물들을 보여주는 인서트 쇼트는 큰 세계, 언제나 자신에 앞서 존재하는 소리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듯한 아미코의 세계와 공명한다.     

 아미코라는 인물을 목격하게 된 관객의 입장에서, 아미코는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 이상함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그저 어린아이의 작은 행동들일 뿐이다. 영화 내내 아미코는 누군가와 길게 대화하지 못한다.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인물은 사유리의 습자 교실에 다니던, 중학교 같은 반에 진학한 이름 모를 남자아이뿐이다. 아미코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대화상대, 함께 놀아줄 누군가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노리는 그저 왕따 당하는 아미코를 잘 대해주라는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모범생이라 아미코와 붙어 있었다. 아미코는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사유리, 데츠로, 오빠, 노리, 귀신, 모든 대상은 아미코에게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아미코는 자신 앞에 놓인 넓은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눈과 귀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미코가 보여주는 이상함의 정체다. 아미코의 부모는 새로 태어날 아기가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누군가를 상대하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견디는 일에 가깝다. 아미코는 그 누구도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을 표출한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은 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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