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파트2> 드니 빌뇌브 2024
*스포일러 포함
<듄>은 거대한 도입부였다. 영화의 개봉과 함께, 이 영화가 그저 파트1뿐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 전체에 관한 흥미가 식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파트1’이라는 것에 알맞게, <듄>은 그저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가 귀족 가문의 후계자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하는 명분을 제공할 뿐이었다. <듄: 파트2>는 폴이 아라키스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챠니(젠데이아)와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 등이 속한 프레멘 집단의 인정을 받고, 어머니 제시카(레베카 페르구손)의 의도에 따라 퀴사츠 헤더락으로 각성하고, 전편의 공습에서 세상을 떠난 줄 알았던 거니(조쉬 브롤린)과 재회하고,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의 계략에 맞서 가문의 복수를 수행한다. 영화는 166분의 러닝타임을 지녔음에도 꽤 숨 가쁘게 전개된다. 요르단의 사막에서 촬영된 사막행성 아라키스의 풍경, 거대한 모래벌레 샤이 훌루드의 모습, 아라키스에 직접 당도하는 황제(크리스토퍼 워컨)의 비행선이 보여주는 압도감이나 페이드 로타(오스틴 버틀러)의 등장 장면에서 <의지의 승리>를 연상시키는 흑백 화면 등, 전작과 마찬가지로 잔뜩 힘이 들어간 이미지들이 러닝타임 전체를 채워낸다.
전작은 모든 것이 시작된다”와 같은 도입부로 마무리되는, 몇몇 실패한 시리즈물에서 봐오던 마무리를 택했다. 폴이 프레멘 전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본작은 전편에서 다루지 못했던 원작 1부의 나머지를 다룬다. 폴은 영웅이 되어야 하고, 드니 빌뇌브는 그 과정을 충실히 영상화한다. 전작을 보고 나와서 <듄>은 영화화보단 충실한 영상화일 뿐이라고 리뷰에 썼었다. <듄: 파트2>에 대한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듄>을 포함한 드니 빌뇌브의 전작들처럼 정해진 운명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폴의 모습에서 영웅적인 고뇌 따위는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빌뇌브의 <듄> 시리즈에서 묘사되는 폴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속 슈퍼히어로들의 고뇌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올 따름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을 설득하기 위한 장치는 그저 관객을 압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이미지와 한스 짐머의 음악뿐이다. 나아가 원작의 이야기를 166분에 담아내기 위해 각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와 인물이 잘려나갔는데, 영화는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들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폴과 챠니의 관계변화는 티모시 샬라메와 젠데이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몇 개의 쇼트로 퉁쳐지고, 그 내용은 바쁘게 전개되는 사건들 사이에서 맥락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생명의 물’을 마시라는 제시카의 전언을 폴이 받아들이는 과정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예지를 통해 아라키스의 남쪽으로 갔을 때 벌어질 일을 보았던 폴은 그곳으로 향하길 망설이지만, 정작 발걸음을 옮기게끔 결심한 순간은 사실상 배제되어 있다. <듄: 파트2>는 그러한 방식으로 사건들을 나열할 뿐이다. 그 사이의 이음매들은 마치 최종편집에서 잘려나간 듯 실종됐다. 영화는 ‘듄’이라는 이름값이 전달하는 무게감처럼 육중한 장면들, 프레멘 전사들을 이끌고 하코넨의 스파이스 수확을 방해하는 순간, 폴이 샤이 훌루드에 올라탐으로써 프레멘 전사로 인정받는 순간, <반지의 제왕>이나 <어벤져스: 엔드게임> 속 장대한 최종결투와 유사한 구도로 만들어진 황제군과의 전투와 같은 것들을 전시한다. 사막행성의 광활한 황량함을 담아내는 데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하는 1.43:1 IMAX 화면비는 그저 ‘거대한 느낌’만을 전달한다.
영화는 영화의 주제였어야 할 운명과 순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은 물론 다분히 신화적 운명론에서 퍼올려졌음이 명백한 주제들은, 맹목적이라 말해도 될 정도로 직선적인 영웅담 속에서 다뤄지지 못한다. 빌뇌브는 마치 자신이 오랜 시간 예언 속 영웅을 기다려온 스틸가인 것처럼 폴의 여정을 뒤쫓는다. 그는 단지 자신이 만들어낸 아라키스의 이미지 속에서 우뚝 서 사막행성의 인민을 지도하게 된 백인 메시아를 숭배할 뿐이다. (여기엔 주연배우 스스로 불러일으킨 영화 외적 논란이 주는 인상도 크게 한몫한다) 제작이 확정되진 않았지만, 파트3의 내용으로 예상되는 원작의 2부 ‘듄의 메시아’에서 폴의 타락이 그려질 예정이라는 것은 별다른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 빌뇌브 영화의 주인공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폴이 꿈에서 본 예지는 연출자의 자기확신을 밀어붙이는 플래시포워드로 전락한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미리 보여진 예언은 뒤이어 나올 장면의 반복이나 다름없다. 빌뇌브는 이번에도, 그리고 여전히 예언과 운명의 폐쇄성 속에 갇힌 영화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