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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3. 2024

어색한 한국어 대사에 관해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

   영화에서 언어는 중요한 문제다. 특히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 살아온 이들이 맞부딪히는 작품이라면 더욱. <패스트 라이브즈>는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온 한국계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여러 영화와 같은 선상에 놓인다. <미나리>, <리턴 투 서울>, <푸른 호수>, <라이스보이 슬립스>, <엄마>와 같은 영화들, <성난 사람들>이나 <파친코> 등의 드라마들, 나아가 직접적인 주제로 내세우진 않아도 한국계 주인공이 등장하며 일종의 맥락이 더해진 <콜럼버스>나 <서치> 등을 떠올릴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흐름은 단지 ‘한국계’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샹치: 텐 링즈의 전설>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이어지는 중화권 디아스포라 서사는 보다 큰 영화들, 대중적이며 거대한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부로서 소화된다. 물론 <페어웰> 같은 소소한 규모의 영화도 있지만. 우리는 이 영화들에서 어떤 언어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 문제는 한국계 ‘외국인’ 연출자와 각본가의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번역과 통역의 문제랄까. <미나리>와 같은 영화에서 한국 관객들이 어색함을 느낀 것은 배우의 한국어 발음뿐만이 아니다. 영어로 쓰인 각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색해진, 번역투의 대사들이 다른 한쪽의 문제로 설정된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후자의 문제가 전면화된다. 12살에 캐나다에 이민 간 후 성인기에 뉴욕에 정착한 극작가 노라(그레타 리)의 다소 어색한 한국어 구사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쭉 한국에 살아온 인물인 해성(유태오)의 번역투 대사들은 (적어도 한국의 관객들에게) 작지 않은 문제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유태오를 배우로서, 종종 연출자로서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만나온 한국 관객들에게 마치 영한 번역된 문어체의 인상을 주는 대사를 소화하는 그의 모습은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물론 여기서 어색한 발음이라던가 번역투의 문제와 같은 것들을 단순히 개인적 호오에 따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지적은 많은 관람후기 및 영화를 관람한 이들과의 개인적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어를 모국어 삼아 살아가는 한국의 관객에게 해외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상한 한국인 묘사는 적지 않은 기간 누적된 문제와도 같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영화 자체에 대한 부당한 평가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인연’이라는 단어 속에 새겨진 ‘전생’의 의미라는, 다분히 한국적이며 동양적인 소재를 풀어냄에 있어 이 영화는 크게 부족함이 없다. 초등학생의 나이에 한국을 떠나 노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 주인공이 가졌을 모호함과 불안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 속에서 자라난 그리움은 해성이라는 대상으로 육화되어 나타난다. 노라와 결혼한 유대인 작가 아서(존 마가로)는 24년 만에 해성과 재회하고 돌아온 노라와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아서는 노라와 해성의 만남이 “좋은 이야기”라며 자신은 그 이야기 속 악역과 같은 역할이냐고 이야기한다. 여기엔 해성에 대한 질투와 같은 감정이 없다. 아서는 단지 한 명의 작가로서,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이 놓인 상황을 메타적으로 바라본다. 이 장면에 앞선 장면, 해성을 만나고 돌아온 노라는 아서에게 해성을 묘사하며 “한국인 같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한다. 노라에게 미국은 해성이라는 대상으로 표현되는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나오게끔 만든 악역일까? 그보다는 흐릿한 유년기의 기억 속에서 한국과 미국이 가는 거리감만큼 큼직한,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어떤 그리움이, 우리가 디아스포라라 말하는 추상적인 정동이 해성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노라의 눈앞에 마침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성을 택시에 태워 떠나보내고 집 앞에서 아서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는 노라의 모습을 담아낸 트래킹 숏은 그 거리감을, 마침내 발견한 그리움의 정체를 인연과 전생이라는 키워드로 게워낸 뒤 떠나보내는 순간을 담아낸다.     

 이러한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100% 한국인으로서 묘사되는 해성의 한국어를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 남성이자 유년기의 첫사랑임과 동시에 한국계 디아스포라 그 자체를 육화한 존재로서 해성이라는 인물은, 어떤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단 노라(그리고 셀린 송)의 머릿속에서 전개되는 관념적인 활동 속에서 창조된 대상에 가깝다.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새벽 4시의 바, 해성, 노라, 아서가 함께 앉아 있다. 영화는 그들의 대화 대신 그들을 바라보는 외화면 속 인물들의 대화를 들려준다. 그들은 세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다. 아시아인, 관광객, 이성애 관계에 관한 스테레오타입적인 이야기와 상상력들이 오간다. 그들의 대화는 저들의 관계를 구체적인 이야기로서 상상하려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물론 ‘이야기’를 담아내는 극영화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로 해설되지 못하는 감정의 영역을 전생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관찰한다. 때문에 해성은 어떤 구체성을 가지지 못한 인물로,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떤 회사에서 일하며 서울 어디에서 살아가는지 모두 명확하지 않은 채로, 노라의 대사처럼 한국인(Korean)이자 한국적(Korean)인 대상으로서 영화에 등장한다. 여기까지의 글이 <패스트 라이브즈> 속 어색한 한국어에 관한 하나의 변호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에 묘사된 거리감들에 (직접적 경험이 적음에도) 공감하면서도 극 중 한국어 대사의 어색함에 의문을 가지며 관람했다. 영화를 보며 느낀 분열된 감상을 하나로 합쳐보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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