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2023
*스포일러 포함
영화의 눈 덮인 마을 풍경을 보며 <드라이브 마이 카>의 후반부를 자연스레 떠올린다. 유운성 평론가의 말대로 “고도로 정갈하게 무대화”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간들. 그곳들은 하마구치의 다른 영화들, 이를테면 <열정>의 조그마한 아파트나 <해피아워>의 온천여관이나 워크숍처럼 달리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의 폐쇄성으로부터 다가오는 질식감이나, <아사코>의 카페와 식당, <우연과 상상> 2부 “문은 열어둔 채로”의 연구실과 버스처럼 외부로 충분히 열려 있다는 사실만으로 스크린에 스며드는 모종의 불안감을 떠올렸을 때,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간들은 새로운 사건이 개방된다기보단 이미 정해진 각본을 따르는 연기가 존재하는 자리로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 관한 혹평이라기보단, 그 영화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필모그래피에서 퍽 이질적인 순간에 놓임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외견상으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공간들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그곳들처럼 정갈하게 다가온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를 찍는 정적인 카메라는 즉각 그러한 인상을 전달한다. 타쿠미가 딸 하나(니시카와 료)를 따라 숲속을 걷다가 잠시간 카메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하나를 목말 태운 채 다시 등장하는 순간 또한, 어떤 정해진 움직임을 수행하는 ‘배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장면을 전후로 하여 등장하는 장면들, 이를테면 자동차를 타고 돌봄학교를 떠나가는 타쿠미의 리버스 숏처럼 등장한 숏이 실은 타쿠미의 차 후방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롱테이크라던가, 기묘한 자세로 서 있는 아이들을 담아낸 트래킹 숏의 끝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술래를 보여주는 것 등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포스터를 보고 <드라이브 마이 카>를 떠올렸을 관객들의 기대를 꺾는다. 더군다나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가 개입된 뒤 반복되는 몇 개의 장면은 타쿠미와 마을사람들만 등장했던 초반부의 장면과 전혀 다른 리듬, 대체로 유머로서 승화되는 리듬을 담아낸다.
이에 관한 가장 단순한 관점은 하라사와라는 시골 마을과 도쿄에서 온 외지인 사이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마을에 글램핑장을 유치하고자 찾아온 도쿄 사람들의 설명회에서, 타쿠미는 반복적으로 ‘균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에 대한 ‘외부’의 침입,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처럼 인간과 자연의 균형은 수호되어야 할 무언가이며 외부인은 그곳에 침입하여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존재라는 익숙한 해석.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익숙하리만치 안온한 ‘환경영화’의 내러티브를 쫓는 것만 같다. 다만 그렇다기에 이 영화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이야기를 적지 않은 시간 풀어낸다. 타카하시가 결혼정보어플에서 매칭되었다던가, 마유즈미가 요양보호사로 일했었다는 정보들은 어떤 의미에서 필요한 것들인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보다 더욱 자동차에 ‘매달린’ 시선으로 하라사와를 바라보는 이번 영화의 시선은 타쿠미가 말한 균형을, 영화 초반부 정갈하게 촬영된 타쿠미와 하라사와 마을의 모습을 조금씩 도려낸다. 자동차 측면과 후방에 부착된 카메라는 균형에 틈새를 만드는 반-휴머니즘적 혹은 객체적 시야로서 타쿠미와 두 명의 외지인을 단순히 이항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균형잡힌’ 인식을 겨냥한다. 그것은 하라사와를 무대로 남기는 대신 그곳의 행위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장소로서 그곳을 담아낸다. 영화 후반부 실종된 하라를 찾는 마을 주민들의 손전등 불빛이 서로 뒤섞이는 것처럼, 자동차에 매달린 카메라의 시선 또한 하라사와 곳곳에서 출발하는 시선들과 교차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당도하는 곳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말이다. 실종된 하나를 찾던 타쿠미와 타카하시는 어느 벌판에서 그를 발견한다. 하나는 총상을 입은 사슴을 바라보고 있다. 타쿠미는 하나를 부르려는 타카하시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는 이어 하나에게 다가가려는 타카하시의 목을 졸라버린다. 영문도 모른 채 공격당한 타카하시는 이내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다. 카메라가 다시 하나와 사슴이 있던 곳을 비추자 사슴은 사라졌고 하나는 땅바닥에 누워 있다. 타쿠미는 하나를 들고 마을로 돌아가고, 기절했다 깨어난 타카하시는 일어섰다가 다시 쓰러진다. 어떤 전조랄 것도 없이 갑작스레 벌어진 이 폭력은 관객을 소화불량에 걸리게 한다. 타쿠미는 왜 갑자기 타카하시를 공격했는가? 도쿄에서 온 두 인물의 몇몇 말들은 하라사와의 자연과 균형을 관광객의 태도로 대상화했다. 그들 또한 노동착취의 대상자이면서 자본의 대리자라는 이중의 지위 안에 놓이지만, 마을에서 그들의 존재는 자본의 대리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마을의 ‘심부름꾼’이자 얼핏 의인화된 사슴처럼 느껴지기조차 한 타쿠미가, 마치 <모노노케 히메>의 목 잘린 사슴신이 폭주하듯 폭력을 내보인 것이라는 다소 납작한 해석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보다는 하마구치의 영화 속에서 외화면으로 밀려났던 폭력, 이를테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다카쓰키가 저지른 폭행이 화면 바깥에서만 벌어졌던 것과 같은 상황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와서야 내화면으로 들어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마구치 영화에 은은하게 존재해오던 불길함과 불안감은 대부분 대화와 등/퇴장의 형식으로 발현되었다. <아사코>에서 바쿠의 행적이라던가, <우연과 상상>이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열려있음만으로 불안감을 자아내는 문과 같은 것 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프레데릭 와이즈먼을 연상케 하는 설명회 장면의 재현으로, 반복되는 사건을 통해 생성되는 유머로, (키아로스타미보단) 자파르 파나히 영화가 놓인 폭력적 제약 속에서 가능해진 자동차-카메라의 탈-인간적 시선이 만들어내는 긴장으로 구성되다가, 영화의 마지막에서 폭발한다. 그것은 하마구치가 각본으로 참여한 <스파이의 아내>의 마지막에서 폭격으로 불타는 해변을 바라보던 사토코의 모습과도 같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처럼 영화는 결국 어떤 세계를 찍어내는 것이라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세계의 구성을 찬찬히 응축시켜낸다. 그것이 결국 터져 나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