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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2. 2017

푸르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풍부하고 진한 감정

140여 개의 상을 수상한 베리 젠킨스 감독의 영화 <문라이트>

 존 싱글톤의 <보이즈 앤 후드>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왕가위와 토드 헤인즈의 <캐롤> 사이에 있는듯한 촬영과 조명, 미술이 조화롭게 뒤섞여있는 영화가 등장했다. 마이애미의 흑인 거리에 사는 샤이론의 유소년기(알렉스 R. 히버트), 청소년기(에쉬튼 샌더스), 청년기(트레반데 로테스)의 이야기를 각각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제목의 3부작 연대기로 담아낸 영화 <문라이트>가 그 주인공이다. 흑인이자 게이인 샤이론의 이야기를 통해 샤이론 개인의 성장기와 감정은 물론, 다른 흑인 주연의 성장영화들처럼 현재 미국 안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다루어진다. 부시 대통령 시대부터 오바마까지 12년을 이어오며 진행된 <보이후드>처럼,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넘어가는 시대에 등장한 <문라이트>가 가지는 시의성 역시 흥미롭다.

 샤이론 인생의 세 부분을 보여주는 3부 구성 속에서, 샤이론은 각각 세 번의 정체화 과정을 거친다. 리틀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 샤이론은 마약중독자인 어머니(나오미 해리스) 대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마약상 후안(메허샬레 알리)과 테레사(자넬 모네)의 따듯함 속에서 일종의 대안가족을 이루며 누군가의 아들로 자신을 정체화한다. 샤이론이라는 본명을 내세운 2부에서는 유소년기 때부터 절친한, 그리고 그의 유일한 친구인 케빈(자렐 제롬)과의 관계 속에서 게이로 자신을 다시 한번 정체화한다. 케빈이 붙여준 별명인 블랙이라는 제목의 3부에서는 근육질의 몸매와 금빛의 장신구들로 거리에서 살아가는 흑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한다. 물론 각 챕터에서 해당 과정만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1부와 3부에서도 샤이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거리에 사는 흑인으로써 강해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 중 하나이다. 각 챕터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샤이론의 겹들이 있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각각 다른 배우가 연기한 세 시간대가 통일성을 갖는다.


 샤이론을 말이 많지 않은 캐릭터로 설정하고 그의 표정과 화면의 이미지로만 감정을 이어가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베리 젠킨스 감독은 세 편의 시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 연작을 만들었다. 이는 배리 젠킨스 감독이 왕가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그답게 영화 곳곳에서 왕가위적인 조명과 촬영이 느껴진다. 가령 어린 샤이론에게 소리치는 엄마를 슬로 모션으로 담아내는 구도와 색감,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케빈과 샤이론을 잡는 카메라 등의 장면이 <문라이트> 속 왕가위적 순간이다. 이런 잠깐의 장면들은 샤이론의 감정을 대사가 아닌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도록 유도한다. 베리 젠킨스가 <화양연화>에했던 이야기인 “감정을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 영상(이미지)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말은 <문라이트>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많은 장면을 단초점으로 담아낸 촬영은 111분의 러닝타임 동안 샤이론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방식이지만, 샤이론 한 명에게 집중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문라이트>의 뛰어난 캐스팅을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샤이론을 연기한 3명의 배우-알렉스 R. 히버트, 에쉬튼 샌더스, 트레반데 로테스-는 얼굴은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눈빛으로 한 명의 인물을 이어간다. 각 챕터 사이에 생략된 시간은 세 배우의 연기로 메워진다. 어디서 이렇게 같은 눈빛을 가진 배우를 캐스팅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캐스팅과 연기를 보여준다. 샤이론과 함께 3부 내내 등장하는 케빈 역시 3명의 배우-제이든 파이너, 자렐 제롬, 안드레 홀랜드-역시 일관된 외모의 유사성 덕분에 각 챕터가 끊겨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극의 흐름에 부합하는 외모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문라이트>가 다시 보여준다. 나오미 해리스가 연기한 마약중독자 어머니는 전형적이지만 적절한, 각본에 적힌 그대로의 훌륭한 연기였고, 적은 분량이지만 인상적이었던 자넬 모네는 더 많은 영화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안을 연기했고,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있는 메허샬레 알리의 연기는 <문라이트>의 화룡점정과도 같다. 1부에 등장하는 그의 연기를 보면, ‘이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에 무언가 변화를 줄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생긴다.


 마약상이 가득한 마이애미의 흑인 거리, 그 거리로 들어서는 차량 한 대를 원형으로 카메라를 돌리며 담아내는 <문라이트> 오프닝은 데이빗 맥켄지 감독의 <로스트 인 더스트>의 오프닝을 닮았다. 두 영화 속에서 대비되는 공간과 공간을 채우는 공기는 사뭇 다르다. 마이애미와 텍사스, 흑인과 백인, 퀴어와 퀴어포빅한 성향의 사람, 마약상과 은행강도, 거리와 은행……<로스트 인 더스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질병과도 같은 가난의 대물림, 약탈자와 피약탈자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극 중 인물들과 같은 현실의 사람들이 왜 트럼프에 투표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반대로 <문라이트>는 레이건 시대부터의 만들어진 흑인 계층의 경제적,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자연스레 퀴어 주인공을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faggot’이라고 놀림받는 어린샤이론에게 “그것은 놀림거리가 아니라 네가 언젠가 알게 될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말해주는 후안과 테레사의 모습은 오바마 시대 속 사람들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넘어가는 격변의 상황에서 <문라이트>와 <로스트 인 더스트>가 같은 해에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쿠바에서 살던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달빛을 받아 푸르게 보이던 자신의 검은 피부 때문에 ‘블루’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이야기한다. 바닷가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보이는 주인공의 검은 피부는 영화의 중요한 이미지이다. 마치 세례를 받듯 후안에게 바다에서 떠있는 법을 배우는 샤이론, 샤이론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밤 바닷가의 풍경, 그 추억을 떠올리는 청년의 샤이론,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소년 샤이론의 모습이 담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문라이트>는 푸르고 검은 이미지들을 통해 샤이론이라는 개인의 삶과 정체성을 관통하여 보여준다. 푸르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풍부하고 진한 감정이 <문라이트> 속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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