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테프트 오토의 햄릿> 피니 그릴스, 샘 크레인 2024
2021년, 영국에선 락다운이 시작되고 연극배우인 샘과 마크는 무대를 잃는다. 절망한 둘은 게임 [Grand Theft Auto Online]에서 시간을 때운다. 둘은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 우연히 게임 내에 구현된 무대를 발견하고, “셰익스피어도 이 게임만큼 폭력적이잖아”라며 장난스럽게 무대 위에서 연극 [햄릿]을 연기한다. 그들의 첫 관객은 그들을 죽이러 온 다른 플레이어였지만, 두 사람은 샘의 파트너이자 필름메이커 피니와 함께 오디션 공고 영상을 찍어 커뮤니티에 공유하고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 <그랜드 테프트 오토의 햄릿>은 영화 전체를 인게임 플레이로 촬영했다. 똑같이 [GTA]를 사용한 여러 머니시마가 다양함 모드를 동원하고 다른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없는 채널에서 제작되는 데 반해, 이들은 언제라도 다른 누군가가 공격해올 수 있는 상황에서 연극을 올리고자 한다. 일시적으로 무대를 잃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객이며, [GTA Online]은 그것을 가능케 해준다. 그들의 오디션을 찾은 이들은 게임 내 모습과 목소리 외에는 알지 못하는 이들과 극단을 꾸린다. 리허설과 공연 중 벌어질지 모르는 방해를 막아주는 말없는 유저들도 함께한다. 누군가는 무대장치가 되어주는 비행선을 운전하고, 누군가는 게임 내 스마트폰 기능을 통해 연극을 촬영 및 생중계한다. 같은 크루가 아니라면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당연한, <프리가이> 같은 영화에서도 종종 패러디되곤 하는 [GTA] 세계의 규칙은 잠시간 효력을 잃는다. 작년 DMZ영화제에서 상영된 <니트 아일랜드>가 생존게임 [DayZ] 속 공동체들을 탐문하는 애그노그래피였다면, 이 영화는 그보단 [배틀그라운드]의 규칙을 잠시간 뒤로 미뤄둔 채 투어를 떠났던 퍼포먼스 <에란겔: 다크투어>에 가깝다. 연극이 끝났다는 선언을 대리하는 ”이제 서로를 죽여도 됩니다!“라는 말은, 몇 개월에 걸친 이 우발적인 프로젝트가 이미 ‘다른 세계’로 존재하는 게임 내에 또 하나의 매직서클을, 어떤 면에서는 가장 고전적이며 기원적 형태의 매직서클인 무대를 고안해내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물론 게임 솓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어설프고, 인게임 키메라의 한계는 종종 연극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의심하게끔 한다. 다만 [햄릿]의 전체를 공연하는 데 서공했다는 것, 그리고 2023년 영국 ‘스테이지 어워드’에서 ‘Innovation Award’를 수상했다는 것은, 그들이 라이브서비스 게임을 무대화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혁명을 경작하다> 니쉬타 자인, 아카시 바수마타리 2024
2020년 인도 모디 정권에서는 기업 친화적인 '농업법'을 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농민들이 집회를 시작한다. 인도 최대 농업지대인 펀자브 지역의 농민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농민 조합이 수도 델리 외곽에 모여 농성을 시작하였고, 그들이 도로에 꾸린 캠프가 25km에 달하는 천막 행렬을 이루기도 했다. 영화는 1,200만 명의 농민이 참여했으며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된 대규모 농민 시위의 기록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진행된 이 시위는 약 8억 명의 농민 생계가 달린 문제였으며, 시위가 지속될 수록 치솟은 실업율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 가사노동에 시달리던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물론 1년 동안 진행된 시위를 충실하게 기록해내기엔 105분의 러닝타임으로는 불충분 할 것이다. 영화는 종종 시위의 진행 과정을 스케치하듯 빠르게 진행되기도 하고, 잠시 시선을 돌려 농민들의 고향을 비추기도 한다.농민들에게 1년이라는 시간은 농업의 한 사이클이 반복되는 시간이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가족을 만나고 가축을 돌보며 해야할 농사일을 처리하고 다시 시위 대열에 합류하곤 한다. 그 지난한 과정은 정부가 내놓은 악법에 대항하는 대정부 투쟁으로서의 성격은 물론, 고향과 인도를 떠나고자 하는 청년 농민들에게 농업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투쟁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일종의 계몽운동으로서의 성격 또한 갖게 된다. 영화 속의 몇몇 인터뷰들은 그것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인서트처럼 삽입된, 논밭을 갈고, 작물을 심고, 그것을 수확하는 장면들은 혁명을 '경작하다(farming)'라는 제목의 의미를 되살려준다. 그것은 장기판을 뒤엎듯 일순간 일어나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작물을 길러내듯 오랜 기간 길러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투쟁은 2021년 농업법 폐지를 약속한 모디 정권과 기뻐하는 농민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되지만, 2024년 봄 정부가 약속한 최저가격제 도입 등을 이행하지 않자 다시금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혁명은 여전히 경작 중(farming)이다.
<빅 데이터의 축> 저우타오 2024
중국 귀주성 산악지대 어딘가에 위치한 데이터센터, 저우타오의 카메라는 그곳의 서버들을 보여주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다. 망원렌즈를 활용한 촬영은 데이터센터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풍광을 우리의 눈앞으로 가져온다. ‘데이터센터’, ‘서버’, ‘빅데이터’와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있는, 농작물을 베고 나물을 채취하고 짐을 나르는 농민, 혹은 자연 속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 차림의 커플, 혹은 버려진 기계나 동상과 같은 것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마치 데이터센터를 감시탐 삼은 구도는, 당연하지만 찍히는 사람들이 찍는 사람의 감시권력을 느낄 수 없음에도, 산악지대의 판옵티콘이라는 구성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데이터를 받아들여 저장하고, 그것을 다시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이터센터의 역할을 저우타오의 카메라가 어떤 면에서 수행 중에 있다. 그것은 롱테이크 속에서 렌즈에 담긴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롱테이크들 사이의 이음매를 지워 하나의 덩어리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흥미로운 것은 카메라가 다시금 데이터센터 안으로 들어와 서버를 비추는 마지막,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유리창에 비친 저우타오의 모습이 슬쩍 담기는 순간이다. 보이지 않았어야 할 감시자가 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데이터가 무형의 디지털 코드가 아니라 물질적 서버와 디스크에 저장된 것이며 물리적 관리의 대상이라는 지점이 가시화된다. 물론 <빅 데이터의 축>은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일기> 로렌스 아부 함단 2024
감독은 2020년부터 2021년 사이 베이루트 영공을 침범한 이스라엘 공군의 비행체를 기록한다. 자신을 포함해 베이루트의 다른 이들이 촬영한 푸티지들로 구성된 <하늘의 일기>는, 끝없이 소음을 유발하며 매달 200~2000시간 가량 베이루트의 하늘을 비행하는 이스라엘 비행체들에 관한 탐문이자 에세이자. 자신 스스를 사립 탐정이자 청각 조사관(Private Ear)로 소개하는 로렌스 아부 함단의 조사는 UN 전자도서관에 보관된 이스라엘의 레바논 영공 침공 관련 서류 중 2020년 8월의 서류가 누락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베이루트 해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수십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때이기에, 그는 다양한 음모론과 절반뿐인 진실(half-truth)를 마주한다. 자료들 속에서 그가 밝혀낼 수 있는 진실은 사실 없으며, 자료에 기록된 사실들은 조작적 정의로서의 진실만을 증거할 뿐이다. 때문에 <하늘의 일기>가 집중하는 것은 실제로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감각, 끝없는 소음과 매일같이 목격하는 침입자를 감각하고 기록하는 데 있다. 비행체의 소음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그것이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도 할 수 있다는 독일 과학자의 연구를 끌어오고, 마크롱의 베이루트 방문 당시 진행된 프랑스 공군의 에어쇼가 얼마나 불필요한 쇼였는지를 이야기하며, 이스라엘을 비롯한 국가들이 총 4천억 달러를 투여해 만든 전투기가 베이루트 상공을 비행하는 것을 보고 하늘을 “고가 부동산”처럼 보게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영공에 대한 주권을 잃아버린, 상공에서 그저 내려다보이는 입장인 자신이 갖는 무력감과 피로감, 분노를 가급적 논리적으로 표현해내는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하늘의 일기>는 제목처럼 그러한 상황의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에새이이기도 하지만, 감각적 경험을 이미지와 자료의 논리로 번역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오물풍선과 국군의 날 에어쇼로 시끄러운 나날을 보내는 한국 수도권의 시민들에게도 가깝게 느껴지는 감각일 것이다.
<하늘의 일기>가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기 직전 이스라엘 공군이 레바논을 폭격했고 헤즈볼라 지도자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봤다.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라는, 그리고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라는 버틀러의 책 제목을 떠올리며, 중동에 평화와 진실이 있기를.
<즐거운 나의 집> 아니카 메이어 2023
영화는 8mm로 촬영된 홈무비와 거기에 덧붙여지는 코멘터리로 구성된다. 홈무비는 1950년대 서독에서 촬영된 감독의 조부모와 아버지의 어린시절이 담긴 모습이며, 코멘터리의 주인공은 감독의 조모 '로제'다. 홈무비 속 가족은 화기애애해보인다. 두 명의 형제는 애 좋게 장난을 즐기고, 해변과 산, 집에서의 가족들은 화목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이미지와 불화하는 것은 로제의 코멘터리다. 아니카 메이어는 로제와 그의 남편 롤프, 그리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촬영된 홈무비를 로제에게 보여주며 그의 코멘터리를 받아낸다. 화목해보이는 가족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로제의 말들은 전형적인 가정폭력의 증언이다. 감독의 할아버지이자 로제의 남편인 롤프는 폭력과 폭언은 물론 바람을 피우며 가정에 소홀한 것이 일상인 사람이다. 로제와 롤프의 반강제적인 결혼이야기도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역설적인 제목으로서 '즐거워 보이는' 집을 보여준다. 이미지와 불화하는 로제의 증언들은 가정폭력이 얼마나 잘 감춰지는지를, 그것을 가정 바깥에서 바라보는 가족의 이미지만으로는 파악해낼 수 없음을 그 자체로 보여준다. 로제의 말처럼 "희미한 기억 속 이미지"들은 "희미하다"는 말과는 별개로 명확하고 구체적인 폭력의 순간들을 소환해낸다. 몇년 전 인디다큐페스티벌과 DMZ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됐던 강예은 감독의 <ㅅㄹ, ㅅㅇ, ㅅㄹ> 속 홈비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는 진실처럼 보이지만 '행복했던 어느 순간'이라는 사실만을 포착했을 뿐 진실을 담아내진 못한다. 미소 이면에, 화목함 이면에, 가족적 순간 이면에, 장난 이면에 숨겨진 것은 무엇인가? 거칠지만 대담한 데뷔작은 그 이면을 숨김없이 들춰보려 한다.
<그래서 다른 세계가 어쨌다고?> 크리크리 소라 렌 2024
경고 하나. 이 영화는 산만하다. AI 제너레이팅을 통해 생성된 이미지 덩어리, 틱톡에 올라온 선정적인 댄스, 포르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이미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푸티지, 내레이션 혹은 음악을 녹음하는 감독의 모습, 모스크바의 길거리와 같은 이미지들이 뒤섞인다. 심지어 영화는 스스로 산만한 몽타주의 템포를 줄일 때 영화가 느려진다는 것에 대한 경고를 수차례 내보내기도 한다. 작년 DMZ에서 상영된 <에이아이 리얼리즘: 2022년 1월의 비극>을 핏 연상시키지만, 생성형 AI를 사용했다는 지점을 제외하면 두 작품은 큰 연관성이 없다. <에이아이 리얼리즘> 빅 데이터 속에서 '딥 러닝'하는 생성형 AI의 특성을 활용했다면, <그래서 다른 세계가 어쨌다고?>는 그것이 짓뭉개버리는 세계-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이제 이미지로서 포착될 수 있는 진실이 아니라는 산만한 선언. 마치 라임을 맞출 줄 모르는 래퍼의 싸이퍼처럼 여기저기로 날뛰는 이미지들은 세계를 더이상 포착할 수 없음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것만 같다. 물론 우리는 어떤 반례들, 데이터를 해킹하고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모종의 진실에 접근하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결국 절반의 진실(half-truth)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의 침묵> 쿰자나 노바코바 2024
1991년부터 10여 년간 지속된 유고슬라비아 연합의 전쟁 기간 동안 무수한 여성이 성노예로 끌려갔다. 경찰은 군인들에게 "사기 진작을 위해 섹스가 필요하다"며 이를 묵인하였고, 포챠 지역의 수많은 여성들이 군인에게 강간당했다. 이 사건은 2001년 3~4월 ICTY(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진행된 재판을 통해 전쟁 중 발생한 집단강간이 처음 전쟁범죄로 인정받은 사건이 되었다. <이성의 침묵>은 그간 제노사이드나 비인도적 무기 사용과 같은 전쟁범죄를 전쟁범죄로 승인하면서도 성노예와 집단강간을 전쟁범죄로 인정하지 않은 '이성'에서의 배제를 다룬다. 영화는 ICTY 재판을 통해 제출된 피해자들의 증언, 법의학적 증거, 현장을 담은 사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방송 보도 녹화 등을 통해 이를 탐구한다. 이것은 알려지지 못했거나 부당하게 은폐된 진실을 파헤치는 종류의 작업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전쟁범죄로 (마침내) 인정받은 사건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하는 종류의 작업도 아니다. 진실은 이미 공적으로 공개되어 있고, 사건의 재구성이라기엔 새로운 구성은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목적은 무엇인가? 영화는 ICTY에서의 재판을 통해 집단강간이 전쟁범죄 판결을 받은 이 사건이 우리의 집단기억에서 부재함을 지적한다. 공적인 기록과 재판결과가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로, 집단기억의 부재는 그것이 아직 완전히 공적으로 승인되지 않았음을, 혹은 공공의 기억으로 편입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그러한 지점에서 증거주의에 입각한 작업을 통해 기억을 구성하고자 한다. 물론 기억이라는 것은 유동적이며, 부정확하기도 하고, 피해자 개인의 입장에서 잊어버리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그러한 맥락들을 교차시키며 기억의 덩어리로서의 영화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