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의 리뷰에서 최근의 MCU의 작품들이 인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며, 단지 세계관의 일부로만 기능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영화의 주인공이 캡틴 아메리카이건, 앤트맨이건, 캡틴 마블이건 중요치 않으며 MCU라는 거대한 세계의 전개 속에서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키> 시즌2, <문나이트>, <샹치와 텐링즈의 전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 <완다비전> 등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인물에 집중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샘 윌슨이 주인공이더라도 그가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갈등을 다룬 <팔콘과 윈터솔저>는 (다소 부족한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볼 수 있었지만,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그저 다가올 세계들의 충돌을 재차 예고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정치적 은유들은 디즈니의 태도나 트럼프 재선 이후의 미국의 현실 등과 엮이며 기능을 잃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썬더볼츠*>는 그 출발점부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곳에 놓인다. 각자 다른 작품들을 통해 한 차례씩 소개된 바 있는 인물들이 모인 팀 '썬더볼츠'의 구성원에겐 반복적인 오리진 스토리도, 세계관 확장의 임무도 주어지지 않는다. 지구에 속박된 인물로써 이들은 멀티버스나 우주적 존재에 관해 신경쓸 방도가 없다. 대신 영화는 이들의 내면이라 부를 수 있는 장소로 향한다. 영화의 메인롤인 옐레나는 <블랙 위도우>와 <호크아이>에서의 사건 이후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뿔뿔이 흩어진 유사가족을 뒤로한 레드 가디언의 일상은 무엇인가? 캡틴 아메리카의 지위를 샘 윌슨에게 내어준 US에이전트의 지위는 무엇인가? 영화는 이미 방대하게 펼쳐진 세계를 새로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세계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방식을 그려낸다. 생각해보면 MCU의 팬들이 <아이언맨> 트릴로지에 열광했던 것은 토니 스타크라는 개인의 내적 변화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썬더볼츠*>는 <어벤져스> 이후 트라우마를 겪던 <아이언맨3>의 토니 스타크를 다루듯 각각의 인물을 다룬다. 규모나 스타일의 측면에서 내세울 것은 없지만 MCU가 잃어버린 내실을 공고히하는 데 주력한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멀티버스 놀음이나 급박스럽게 새로운 빌런을 소개하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물론 이번 영화를 통해 MCU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MCU의 작품 릴리즈 일정은 포화상태이고, 디즈니+를 통해 공개된 무수한 영화들은 물론 엑스맨의 합류 또한 공식화된 상황 속에서 캐릭터 자체는 뒷전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썬더볼츠*>는, 비록 빌런으로 불리는 이들이 모인 팀임에도 불구하고, MCU의 신작을 기다리던 청소년기의 기억을 슬그머니 떠올리게끔 한다.
2. <거룩한 밤: 데몬헌터스>는 마동석이 제작한 영화 중 가장 조악한 작품으로 단박에 등극했다. <범죄도시> 시리즈를 필두로 <성난 황소>, <악인전>, PUBG와의 콜라보인 <그라운드 제로> 등에서 마동석과 빅펀치픽처스 사단이 보여준 이미지는 단순명료했다. 마동석의 주먹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 <거룩한 밤>은 그 공식을 벗어난다. 강바우(마동석)이 악마 숭배자들을 주먹으로 가로막으면 퇴마사 샤론(서현)이 구마의식을 거행하고, 김군(이다윗)은 이러한 활동을 위한 정보를 모은다. 물론 <이터널스>에서 증명되었듯 마동석의 캐릭터가 팀플레이 속에서 휘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컬트 장르와의 결합은 둘째치고, 92분의 러닝타임을 채울 충분한 플롯과 장면의 아이디어가 결여된 채로 촬영에 들어간 작품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프리퀄격의 웹툰이 연재되었으나 극장을 찾은 관객 중 그것을 읽어본 관객은 손에 꼽을 것이다. 영화 속 뉴스는 30명이 넘는 피해자가 살해당한 상황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숭배자들의 난동을 보도하지만, 뉴스 바깥의 영화 속 세상은 너무나도 평온해보인다. <퇴마록>의 배경처럼 일반 세계에서 분리되어 숨겨진 장소를 그려내는 것도 아닌데, <거룩한 밤>의 서울은 언급되는 것과 다르게 마동석 제작의 다른 영화들 속 서울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설정에 결합된 오컬트 장르는 하나의 개성이 되는데 실패한다. 이미 오컬트적 대상을 '물리적으로 퇴마'하는 영화는 수두룩하다. 뱀파이어들과 혈투를 벌이는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있고, 수녀 악령과 엽총으로 대결하는 <더 넌> 같은 영화도 있었다. 그러한 방식을 뒤로하고, 마동석표 액션을 가급적 배제하는 <거룩한 밤>의 선택은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마동석이 자신에 대한 캐릭터 분석에 처음으로 실패한, 혹은 분석을 너무 과신한 결과물이 아닐까.
3. 5편이 개봉한지 꼬박 14년만에 나온 신작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은 <스크림>이나 <할로윈>의 최신 시리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거의 유산을 변형하고 재정의하고자 한다. <스크림>은 슬래셔의 규칙을 정리하고 그것으로 유희해 온 웨스 크레이븐의 작업을 2020년대 할리우드의 정신없는 IP놀음 한복판으로 끌어옴으로써 과거의 유산을 갱신하는 데 성공한다. <할로윈>은, 비록 두 편의 후속작은 형편없었지만, 슬래셔 장르 속 살인마의 행위를 피해자였던 로리가 수행함으로써 역전된 규칙의 쾌감을 제공한다. 호러 프랜차이즈는 결국 규칙놀음이며 퍼즐게임이다. <블러드라인>은 그것에 충실하다. 거대한 재난의 환영을 목격하는 이가 있고, 그를 통해 목숨을 건진 이들에게 하나하나 죽음이 찾아온다. 이번 영화에서 새롭게 드러난, 혹은 추가된 규칙은 죽음의 순서가 생존자의 혈육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재난의 발생 자체를 막았기에 이번 영화의 생존자는 백여명의 규모이고, 죽음이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생존자의 손자들에게까지 차례가 찾아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규칙이다. 영화는 그러한 규칙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아는 듯 자조적인 코미디를 집어 넣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음 차례였던 누군가가 사실 혼외자였기에 죽음의 차례에서 제외된다는 식이다. 골드버그 장치마냥 작동하는 죽음의 전조를 기록하고 탐구한 노트라던가, 여러 갈래의 전조들을 설정해두고 어떠한 방식으로 죽음이 찾아올지 기대하게끔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안정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14년만의 컴백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영화 안에 빼곡히 들어 있다. 5편의 엔딩을 제외하면 작품 간 별다른 연계가 없던 시리즈 속에서 유일한 터줏대감이었던 토니 토드에 대한 아주 적절한 헌사를 보내기도 한다. 물론 속편을 기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오래 묵은 프랜차이즈가 오랜만에 되돌아왔을 때에만 가능한 일회적인 이벤트에 가깝다. 이 영화의 속편은 필연적으로 본작의 완성도를 갖추지 못할테다. 이 말은 곧 이 프랜차이즈를 제대로 즐길 마지막 기회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4. 구병모의 원작을 읽진 않았다. 다만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트위터에서 '여성서사'가 화두에 올랐던 몇 년 전, 임산부석에 앉은 임산부를 괴롭히던 중년 남성을 노년 여성 킬러가 암살하는 순간이 묘사된 소설의 한 부분을 캡쳐해 올린 누군가의 트윗을 통해서다. 해당 장면은 이번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원작과의 비교는 할 수 없지만, <파과>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다. <차이나타운>이나 <미옥>처럼 지난 10년 사이 등장한 '여성 느와르' 영화 속 중년/노년 여성 범죄자들은 단순한 뒤바뀐 젠더롤을 수행하거나 또 다른 방식의 대상화 속에 놓였다. <파과>의 주인공 조각은 그러한 맥락에서 벗어난다. 냉혈안으로 여겨지는 전설적인 킬러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성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되길 거부하는 제스처들 속에서 다시금 방향을 선회한다. 사실 영화를 본 직후 떠오른 것은 "이 영화는 (유사-가족이 아니라) 유사-근친 서사다"라는 생각이었다. 여기에 이런저런 정신분석학적 키워드를 덕지덕지 집어넣은 이야기도 가능하겠지만, 오이디푸스적인 살부서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일인일 때를 상상한 결과물처럼 다가온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하면 될 것 같다. 때문에 이혜영이 연기하는 킬러 조각은 특정한 방식으로의 규정됨을 벗어나 플래시백으로 점철된 허술학 극작술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지켜낸다. 액션이나 스릴러 장르로서는 안타까운 만듦새지만 (그래도 신시아의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멜로드라마로서는 민규동의 영화들에서 느껴온 애매하기에 관심이 가는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5. 네오 소라의 <해피엔드>에서 '짜지는' 부분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이상한 점은 고등학생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신기한 일이 벌어지면 사진도 찍는다. 하지만 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해 동영상을 시청하거나, 소셜미디어를 보거나, 친구들과 채팅을 나누는 상황은 묘사되지 않거나 그 존재를 인지할 정도로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파시즘 내각의 디지털 통제사회라는 설정 속에서 소셜미디어 등의 플랫폼 또한 이미 통제 대상이기 때문일까?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해피엔드>를 보는 내내 떠오른 생각은 "<배틀로얄>이나 다시 보고 싶다"였다. 이 영화는 파시즘적 세계를 할리우드 사이버펑크 전통 속에서 테크노오리엔탈리즘적으로 타자화된 일본 이미지를 끌어와 묘사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저항은 다분히 고전적인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교장실을 점거하거나 가두시위에 나서는 학생들의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물론 저예산의 한계라는 지점이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저항' 자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교화와 훈육을 위해 시행된 '배틀로얄'의 생존자 나나하라 슈야가 테러리스트가 되어 고층빌딩을 폭파하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함께 들려주던 <배틀로얄 2: 레퀴엠>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린다. <해피엔드>에서 청소년은 저항의 주체가 아니다. 이 영화의 묘사는 그저 저항을 하나의 스타일이자 취향으로 택할 수 있는 존재에 가깝다. 정치적이지도, 현재적이지도 못한 이 영화는 테리야마 슈지나 소마이 신지부터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과거의) 천카이거에 이르는 동아시아 거장들의 레퍼런스 속에서 자신이 놓이기로 결정한 위치에 그저 멈춰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