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했던 말> 안드레이 우지커 2024
1965년 8월, 비틀즈는 공연을 위해 뉴욕에 방문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본격화되던 시기, 뉴욕의 거리는 호텔로 들어서는 비틀즈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경찰들로 아수라장이 된다. 비명과 환호가 오가고 한껏 상기된 목소리의 소녀들은 TV 리포터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최애 멤버와 곡을 이야기한다. 같은 시기, 대륙 반대편의 LA에서는 ’와츠 폭동’이 일어난다. 영국음악이 침투히지 못함 댄스홀에서는 디스코가 들려온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한다. 뉴욕의 경찰은 몰려든 팬들을 관리하지만 LA의 군인은 모여 있는 흑인들을 흩어 놓는다. 다만 영화는 그것들의 실제적인 기록의 재배열에 그치지 않는다. 비틀즈와는 전혀 관계 없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촬영된 홈비디오 푸티지에 (카메라를 든 사람의 시점을 취하는) 보이스오버들을 붙여 다시 맥락화하거나, 비틀즈라면 돌아다닐 수 없었던 뉴욕의 길가리들에 애니메이션으로 그들의 형상을 그려낸다. 뉴스 푸티지부터 홈비디오까지 다양한 출처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들로 만든 도시교향곡의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도시교향곡 영화들이 갖추고 있을 법한 특정 테마의 범주를 설정하는 대신 ‘비틀즈의 미국 방문‘ 하나만을 느슨한 연결점으로 설정한다. 비틀즈, 폭동, 박람회로 인해 들썩이는 도시들, 거리를 기득 채우는 사람의 물결과 각기 디른 인상의 건물들로 구성되는 도시 정경, 거대한 활력 아래 잠재된 분열을 이 영화는 60년 전의 이미지들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찾아진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밀일 수밖에> 김대환 2025
춘천을 배경으로 한 김대환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각자의 비밀을 가진 두 가족 여섯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담아낸다. 전작 <초행>이 결혼을 요구받는 장기연애 커플이 경험하는, 아직 사회초년생을 벗어나지 못한 30대 초반의 삶이 갖는 불확실성을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는 그것과 사뭇 다른 톤을 갖는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불확실한 것은 없다. 단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사실들을 다른 가족(혹은 가족이 될지도 모를 타인)에게 말하지 못하는 각자의 사정이 존재할 뿐이다. 세대, 직업정체성, 디아스포라, 성적지향 등의 문제는 각자의 정체성이자 비밀이다.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혹은 과거)이 외부로 폭로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며, 단지 그것의 후폭풍을 감내할 자신이 없을 뿐이다. 그들의 우연한 만남은 비밀들이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다만 <비밀일 수밖에>는 거기서 멈춰버린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정체성의 캐릭터는 장영남, 류경수, 박지일 등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를 펼칠 장소 이외의 것이 되지 못하고, 엇비슷한 영화들(<패스트 라이브스> 같은 교포 감독의 미국영화부터 <한국이 싫어서> 등의 한국영화까지)과 크게 구별되는 지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래도, 사랑해> 김준석 2025
연극배우 부부 준석과 소라는 생계와 육아 문제로 맘편히 공연을 올리지 못한다. 시어머니는 소라가 육아 대신 자리를 비우고 연기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대리주차 일을 하는 준석은 자신과 소라 중 누가 먼저 연기를 다시 해야할지 주변 연극인들에게 물어본다. 두 사람은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자체 오디션을 진행한다. 실제 연극배우 부부인 김준석과 손소라는 영화 속에서 자신, 혹은 자신괴 한없이 닮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두 사람의 아들 하람이 출연하는 것은 물론이다.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은 아무래도 그들의 실제 삶에서 길어 올려진 것일테다. <그래도, 사랑해>는 영화적 기교나 장치를 끌어들이는 대신, 솔직한 질문을 카메라 앞에서 풀어낸다. 얼핏 박송열&원향라 커플의 소박하고 단단한 연상되기도 하는, 자신을 재료로 함께함을 담아내는 영화의 아름다움이 <그래도, 사랑해>에 있다.
<뜬소문> 가이 매딘, 에반 존슨, 게일런 존슨 2024
가이 매딘과 존슨 형제의 협업 중 가장 실망스러운 실패작이 아닐까. G7의 지도자들이 모여 ‘최근의 위기‘에 대한 잠정적 합의에 관한 성명서를 작성하던 중 찾아온 아포칼립스를 블랙코미디풍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그들이 할리우드의 재료들로 샌프란시스코를 재구성하고자 시도한 <녹색 안개>에서처럼, 그들은 <뜬소문>을 통해서도 할리우드를 상대하고자 했던 것만 같다. 이를테면 모든 이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전제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크게 특별한 일로 취급되어 어떤 ’의도‘의 대상이 된다. 인물 클로즈업 위에 얹혀진 과장되고 정형화된, 가편집 과정에서 레퍼런스나 컨셉으로 올려진 것 같은 음악들은 인물의 표정에 앞서 감정을 결정해버린다. 물론 의도랄 것은 확실하다. 영화는 초강대국들의 현실정치를 비꼬고, 그 안에 내포된 모순과 거짓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로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은, 마치 마지막의 성명서처럼 분명 이들이 겪은 사건들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결국 AI의 아무말처럼 맥락없이 완성된다.
<도주> 아다치 마사오 2025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부대 소속으로 연쇄기업폭파투쟁에 참여한 키리시마 사토시의 삶을 다룬 극영화. 아다치 마사오의 전작 <레볼루션+1>이 그랬던 것처럼 조악하다면 조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제작되었다. 반제국주의와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적 동력에서 출발한 이들의 활동은 주요 활동가들이 체포되며 일단락되지만, 체포를 면한 키리시마는 우치다 히로시라는 가명으로 살아가는 도주 생활을 시작한다. 영화는 40년 넘게 이어진 그의 도주 생활을 그려낸다. 폭탄을 통한 투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키리시마와 유사한 상황의 동지들 또한 하나 둘 체포되어 간다. 그가 택한 것은 "투쟁의 방식으로서의 도주"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그곳의 활동이 법률상의 죄목으로 치환되어 적힌 현상수배 포스터가 곳곳에 붙음으로써. 그의 도주기간이 늘어날수록 그의 투쟁은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자기합리화인가, '비살상'을 강령 삼은 투쟁의 윤리인가? 아다치 마사오는 후자의 관점으로 키리시마의 도주를 담아낸다. 영화의 투박한 만듦새가 잡아내는 그의 단단한 표정,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살상 목적의 테러, 팔레스타인에서의 제노사이드와 같이 투쟁이 필요한 장소와 사건은 갈수록 늘어나고, 영화는 키리시마의 몸이나 얼굴 위에 그것을 전하는 뉴스 이미지를 띄운다. 그의 도주는 새로운 연대투쟁의 장소들과 결합되지 못하고, 그럴 때마다 키리시마는 자책한다. 멍청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투쟁의 순수를 아다치 마사오는 잡아내고자 한다. 도주에서 도망치지 못한 그는 생의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도주로서의 투쟁'이 완수되었음을 말하고 자신의 본명을 밝힌다. 승리가 아니라 종료가 선언되는 순간, 그것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잠 #2> 라두 주데 2024
"살아있는 것이 멋진 이유는 죽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말로 시작하는 영화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그의 묘비를 한 시간 동안 비춘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는 2022년 1월부터 2023년 1월까지 CCTV처럼 보이는 카메라로 촬영된 앤디 워홀의 묘비를 라두 주데가 자신의 컴퓨터로 보면서 기록한 것들이다. 종종 맥OS로 화면이 녹화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감독은 이 영화가 데스크톱 필름임을 드러낸다. 앤디 워홀이 320분에 달하는 영화 <잠>을 찍기 위해 연인이 자는 모습을 직접 카메라로 담았던 것과 달리, 라두 주데는 거주지인 루마니아에서 대서양을 건너야 있는 미국 팬실베니아의 묘지를 원격으로 목격한다. 영화는 워홀의 묘지를 찾아 사진을 찍거나 아이코닉한 통조림을 헌화하듯 묘비에 올려놓는 사람들을, 풀을 뜯어 먹기 위해 지나가는 사슴과 토끼를, 사계절을 거치며 내리치는 비와 눈을 보여준다. <잠>을 비롯해 <키스>, <블로우잡>, <EAT> 등 앤디 워홀의 영화는 영화 안에서 자고 키스하고 애무하고 먹는 것 등 실제와 연기(가상) 사이에 놓이는 행위들의 존재론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잠 #2>에서 라두 주데는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패러디한다. 아이코닉한 거장의 묘지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앤디 워홀의 '영원한 잠'을 방문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워홀의 작업이 무엇이든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라두 주데는 그것의 죽음 또한 같은 방식으로 다루고자 한다.
<폐허에서 파쿠르> 아리브 주아이테르 2024
미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감독은 2015년 우연히 폭격을 배경으로 파쿠르하는 가자지구의 파쿠르 팀 영상을 보게 된다. 감독에게 가자지구의 바다는 어머니를 떠올리게하는 추억의 공간이자 기억의 장소이지만, 그곳은 이스라엘에 의해 계속하여 파괴된다. 파괴된 폐허를 놀이터 삼아 파쿠르를 연습하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감독은 희망을 발견하고, 그들 중 한 명인 아흐마드에게 연락을 취한다. 파쿠르 영상을 찍던 아흐마드는 금새 감독과 친구가 되고,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온라인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파쿠르는 죽음과 파괴가 만들어낸 폐허를 생기 가득한 유희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나아가, 하나의 스포츠 장르로서 파쿠르는 좀처럼 가자지구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청년들이 대회 참가를 통해 세계를 접하고 망명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흐마드는 파쿠르 팀을 만들었던 이들이 이미 스웨덴으로 떠났다고 말한다. 물론 망명은 많은 것을 저버리는 것이다. 가자지구에 남겨진 가족과 친구,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 아흐마드 또한 앞선 이들처럼 망명을 택한다. 스웨덴에서 아이들에게 파쿠르를 가리치며 생활하는 그의 모습은 파쿠르가 그 자체로 생존의 방식이 됨을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부, 폭격이 벌어지고 불길이 치솟는 가자지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감독은 이 영화가 2024년에 제작되었음을 밝힌다. 더 많은 폐허가 만들어지는 가자지구에서, 파쿠르의 역동은 여전히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영화는 그것에 답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과 아흐마드는 '폐허에서 파쿠르'하는 이들의 생기가 가진 희망을 믿고자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팔레스타인인의 생명력이자 정체성이다.
<비디오헤븐> 알렉스 로스 페리 2025
'킴스 비디오'의 점원이었던 알렉스 로스 페리가 연출한 비디오 대여점에 관한 에세이 영화. 비디오와 관련된 TV 광고에서부터 무수한 할리우드 영화 및 드라마에서 발췌한 장면들로 구성되었다. 영화 이미지를 통해 도시를 재구성하는 톰 앤더슨의 <로스엔젤레스 자화상>이나 가이 매딘의 <녹색 안개>처럼, <비디오헤븐>은 비디오대여점과 비디오문화의 재현을 다룬다. 비디오의 시대가 저물게 된 경제적, 기술적, 매체적 맥락을 다루고자 함이 아니다. 그가 다루는 것은 대여점에 대한 인식과 감성의 무네다. 국내에서 비디오 도입 당시 '음란'이나 '폭력' 같은 키워드로 묶였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초창기 비디오대여점은 야하고 폭력적인 포르노나 호러영화를 주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블록버스터'와 같은 거대 체인점이 대여점을 가족적 공간으로 인식되게끔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면서야 그 인식이 변화하였다. 그러면서 대여점은 사회적인 공간이 된다. 소비자와 판매자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영화에 관한 지식과 정보의 교환이 이뤄지고, 영화를 매개로 인간사가 펼쳐지는 곳. 영화와 드라마들은 오랜 시간 대여점을 그러한 공간으로 그려왔다. 감춰져야하는 것이자 드러내지는 것으로서 성적 욕망의 모순이 드러나는 공간이었고, 시덥잖은 플러팅과 데이트가 벌어지는 공간이었으며, 점원과 영화 취향을 겨루거나 '꼽주기' 당하는 공간이었다. <비디오헤븐>은 할리우드가 비디오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거뒀음에도 그것의 재현에 있어 부정성이 더 컸다고 이야기한다. 대여점의 묘사는 갈수록 가기 불편한 곳, 원치 않는 접촉을 겪어야 하는 곳, 너드나 찌질이들이 찾는 곳으로 변화했다. 대여점은 이제 80~90년대를 묘사하는 단순한 배경으로 전락했다. <비디오헤븐>은 그것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자 하는 기획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한 시대가 저물었고, 이전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를 보게 된 지금을 이야기할 뿐이다. 모든 영화를 손에 쥔 듯한 시대착오의 시대가 지나가고, 모든 영화가 기업의 손에 쥐어진 시대가 찾아왔다. 이 영화가 그리워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만남 속에서 역동하는 문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 2024
영화는 인기 마타도르(matador)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몇몇 경기를 따라간다. 경기가 끝나고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피묻은 경기복을 벗는 장면, 밴을 타고 동료 투우사들과 함께 이동하는 장면, 반데리예로(banderillero)가 던진 작살과 피카도르(picador)의 창에 맞아 피 흘리는 소, 소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경기를 마무리하는 마타도르.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현대에도 벌어지는 잔혹한 전통 유희를 기록한다. 알베르 세라는 투우사와 소가 아닌 대상, 이를테면 경기장의 관중석이나 레이에게 다가오는 팬, 소가 살던 농장과 같은 것들을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앞에서 흥분한 소가 있고, 그 소를 상대하고자 목숨 건 쇼를 펼치는 인간이 있다. <고독의 오후>는 동물권을 이야기하며 야만적이고 잔혹한 투우를 비판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스페인의 어떤 전통으로서 투우를 옹호하지 않는다. <고독의 오후>에는 우리가 투우에 관해 통상적으로 기대할 법한 입장이 없다. 프로듀서 몬세 트리올라는 전주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투우에 관한 입장을 묻는 관객의 질문이 "우리가 촬영하지 않았어도 벌어질 일을 찍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질문에 관한 회피가 아니다. 투우사와 소에게만 집중하는 프레이밍은 투우라는 행위 자체의 비윤리와 매혹을, 광기와 쾌감을, 신성과 모독을, 그 모순들을 찍는다. <고독의 오후>는 하나의 '쇼'로서 투우가 가진 허구성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관한 영화이지, 윤리적 쟁점을 다루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소, 행운을 빌며 십자가 목걸이에 키스하는 투우사, 환호하는 관객, 소에 받혀 쓰러지는 투우사, 소의 '품종'을 예찬하다가도 경기장에서 저주를 퍼붓는 투우사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과장된 투우사의 포즈와 표정, 이것들은 투우라는 허구의 구성물이다. 다시 말해, <고독의 오후>는 목숨을 매개 삼은 픽션의 존재를 찍는다.
<무색무취> 이은희 2024
삼성전자 노동자 고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뒤, 2007년 발족한 시민단체 '반올림'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산재 인정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무색무취>는 삼성과 그 하청업체를 비롯해 국내에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 그리고 지금은 폐쇄된 대만 RCA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사례를 다루며 반도체 산업의 이면을 다룬다. 한국 고도 성장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반도체 산업은 무수한 유독물질을 흡입하며 노동해 온 이들의 죽음과 질병 위에 서 있다. 새하얀 방진복을 입고 한없이 청결한 '클린룸'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의 제목처럼 '무색무취'의 청결함 속에서 안전함을 달성한 것처럼 재현된다. 뉴스가 그랬고, 기업의 보도자료가 그러했으며, 국가 홍보영상이 그러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증언한다. "클린룸의 청결은 노동자가 아니라 반도체를 위한 것이었다"는 어느 노동자는 말한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그들은 화학약품에서 나온 증기를 '직빵'으로 쐬고, 납땜 연기를 들이마시고, 화학약품에서 풍기는 시큼하거나 달달한 냄새를 맡는다. 대기업의 고임금과 복리후생은 미래를 꿈꾸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안전하지 못한 노동환경은 그들에게 미래를 앗아갔다. 반올림을 비롯한 전세계 곳곳의 반도체 산업 노동자와 연대조직은 또 다른 노동자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투쟁한다. <무색무취>는 그들의 투쟁 그 자체를 담아낸 익숙한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에 속하진 않지만,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경험한 감각이 반도체 산업에 관한 미디어 재현과 다르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영화 속 한 노동자의 말대로 카메라는 냄새를 기록하지 못하지만, <무색무취>는 그 냄새를 맡았다는 증언을 담아내고 그 냄새를 관객 앞에 가져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