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해외영화 10편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올해가 어떤 한 해였는지 모르겠다. 논문과 내란에 휩쓸려간 상반기와 프리랜서로 생존하기 위해 무수한 한국독립영화를 봐야했던 하반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올해 유독 심사가 많았던 만큼 영화제나 시네마테크, 기획전에서 원하는 영화를 관람한 횟수는 줄어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대학원을 두 학기 다녔던 작년보단 널널한 편이었지만...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지만 가급적 다양한 영화들을 보고자 영화제와 상영회들을 누비고 다닌 한 해였다.


무수한 영화들 속에서 무얼 관람할지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기준은 이전에 자주 접하지 못했던 국가와 감독의 영화들을 가급적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중동, 동남아, 동유럽, 남아메리카 등의 영화들. 물론 개봉한 영화들을 주로 챙겨볼 수밖에 없던 일상이었기에 올해 관람한 해외영화의 절대다수는 할리우드이긴 했지만, 이전보다 다양한 국적의 영화들을 (그나마) 챙겨볼 수 있었다. 더불어 올해 국내 영화제나 상영회를 통해 소개된 팔레스타인 영화들을 가급적 전부 챙겨보고자 했는데(디아스포라 영화제를 통채로 못 간 덕에 몇 편을 놓쳤지만),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원고를 통해 소화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영화들을 보며 일종의 공통감을 느꼈던 한 해였다. 본격적으로 생성형 AI가 영화 이미지의 영역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영화들은 적극적으로 세계의 연결된 위기와 무기력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물론 무기력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할 것인가에 관한 영화들이었지만. 엔데믹이 선언된 지도 2년이 흘렀고, 그 사이 한국에서의 내란을 비롯해 내전과 학살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며칠 전 녹음한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크리틱'의 12월 에피소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각자가 각자의 카메라와 눈으로 목격한 위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를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때 얘기한 위기는 정치적인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영화나 극장, 혹은 우리가 알던 카메라 이미지에 대한 것이기도 할테다.


여하튼, 올해 관람한 해외영화 중 10편을 꼽아보았다. 단편과 장편을 구분하지 않았고, 극장개봉 및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들로 꼽았다.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올해 이전에 관람하여 이전 리스트에 포함된, 가령 <배심원 #2> 등의 작품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20250328101915.jpg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 2025

영화는 인기 마타도르(matador)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몇몇 경기를 따라간다. 경기가 끝나고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피묻은 경기복을 벗는 장면, 밴을 타고 동료 투우사들과 함께 이동하는 장면, 반데리예로(banderillero)가 던진 작살과 피카도르(picador)의 창에 맞아 피 흘리는 소, 소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경기를 마무리하는 마타도르.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현대에도 벌어지는 잔혹한 전통 유희를 기록한다. 알베르 세라는 투우사와 소가 아닌 대상, 이를테면 경기장의 관중석이나 레이에게 다가오는 팬, 소가 살던 농장과 같은 것들을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앞에서 흥분한 소가 있고, 그 소를 상대하고자 목숨 건 쇼를 펼치는 인간이 있다. <고독의 오후>는 동물권을 이야기하며 야만적이고 잔혹한 투우를 비판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스페인의 어떤 전통으로서 투우를 옹호하지 않는다. <고독의 오후>에는 우리가 투우에 관해 통상적으로 기대할 법한 입장이 없다. 프로듀서 몬세 트리올라는 전주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투우에 관한 입장을 묻는 관객의 질문이 "우리가 촬영하지 않았어도 벌어질 일을 찍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질문에 관한 회피가 아니다. 투우사와 소에게만 집중하는 프레이밍은 투우라는 행위 자체의 비윤리와 매혹을, 광기와 쾌감을, 신성과 모독을, 그 모순들을 찍는다. <고독의 오후>는 하나의 '쇼'로서 투우가 가진 허구성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관한 영화이지, 윤리적 쟁점을 다루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소, 행운을 빌며 십자가 목걸이에 키스하는 투우사, 환호하는 관객, 소에 받혀 쓰러지는 투우사, 소의 '품종'을 예찬하다가도 경기장에서 저주를 퍼붓는 투우사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과장된 투우사의 포즈와 표정, 이것들은 투우라는 허구의 구성물이다. 다시 말해, <고독의 오후>는 목숨을 매개 삼은 픽션의 존재를 찍는다.

1756088270(0).jpg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알렉스 바크리 2025

2008년 독일의 영화감독 마르쿠스는 서안지구 제닌(Jenin)의 폐쇄된 영화관 '시네마 제닌'을 재개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스라엘과 EU의 펀딩을 받아 진행된 프로젝트 속에서, 40년 넘게 극장의 영사기사로 일해온 후세인은 중심점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말하는 '영사 전문가'는 제닌에 남아 있는 오래된 영사기나 새로 들여온 영사기의 설치부터 애를 먹는다. 후세인은 자신이 아직 영사기사로서 가진 기술과 자부심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영사기를 다시 작동시키고자 하고, 오래 방치된 영사기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영화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시네마 제닌 재개관 프로젝트 동안의 후세인을 담아낸다. 2008년이면 이미 영화관 영사의 헤게모니가 디지털로 넘어간 시기임에도, 팔레스타인의 낙후된 영화관에서는 여전히 필름 기반의 영사시스템이 유효하기 때문에 영사기사의 존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독일에서 넘어온 프로젝트의 실행자들은 그러한 팔레스타인의 실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서구에서 낙후된 지역을 돕는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익숙한 '백인 구원자' 서사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영사기술의 헤게모니 변화에도 불구하고 40년 이상 영사기사로 일해온 후세인의 모습은 영화의 디지털 이행기 속에서 잊혀지고 실직하는 영사기사라는 직군의 현재를 보여준다. 극장의 재건과 재개관에 있어 영사기사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는 듯이, 프로젝트의 진행자들은 후세인의 노고와 그가 지켜온 영사의 유산에 알맞은 보수와 명예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레이어들은 영화의 기초적인 지지체로서 필름과 필름영사기, 그것들을 다루는 영사기사의 쇠락을 한 축으로, 다른 한 축에는 이스라엘과 독일의 지원이라는 조건 속에서야 재개관할 수 있으며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행정 절차를 거쳐 텔아비브로 향해야 한다는 점령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한 축으로 설정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축은 일종의 문화 제국주의 프로젝트로서의 시네마 제닌 재개관 프로젝트를 바라보게끔 한다. 시네마 제닌의 재개관 프로젝트는 이미 2011년 프로젝트를 주도한 마르쿠스 베터에 의해 <시네마 제닌>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재개관 프로젝트와 다큐멘터리를 주도한 마르쿠스 베터 등의 서구인들이 정말로 시네마 제닌이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어떠한 공간으로 기능해야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결여된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마지막은 재개관으로부터 7년 뒤 영화관은 다시금 문을 닫았고, 그로부터 몇 달 뒤 후세인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려준다. 영화의 제작자인 알렉스 바크리는 독일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감독이자, 동시에 마르쿠스 베터의 <시네마 제닌> 제작 당시 촬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부산영화제 GV에서 그는 팬데믹 이전에 마무리된 후세인의 이야기가 2025년에야 공개된 것에 그저 '운'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하지만 2025년의 시점에서 '시네마 제닌'과 영사기사 후세인의 이야기를 목격하는 것은, 우리를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인도한다.

1753711559(1).jpg

<마른 잎> 알렉산드레 코베리제 2025

영화는 어느 날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사진기사 딸을 찾는 아버지 이라클리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라클리는 레반이라는 남자와 함께 조지아 전역의 축구장을 돌며 딸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186 분의 러닝타임 동안 레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구형 소니 핸드폰으로 촬영된 이미지는 유튜브에서 360p로 화질을 설정한 것처럼 뭉개지고 픽셀화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조지아의 풍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하게 한다. 그렇다고 <마른 잎>의 배경이 과거인 것도 아니다. 이라클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영화 내내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 영화는 조지아를 그러한 방식으로 담아내길 결정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코베리제의 선택은 저화질의 디지털 이미지가 8mm 필름이 특정한 감성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다. 노출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으며 영화 내내 (감독의 형제인 데이비드 코베리제가 연기한) 이라클리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반복되는 듯한 조지아의 풍경(숲, 도로, 그물 없는 골대 등)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다. 딸이 들렀을 법한 축구장들을 찾아다니는 이라클리의 여정은 부재하는 대상을 뒤쫓는, 그야말로 유령을 뒤쫓아가는 로드무비나 다름없다. 동시에 그와 동행하는 레반 또한 모습 없이 목소리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유령과 다름없다. 유령과 동행하며 유령적 존재를 뒤쫓는 로드무비, 저화질의 뭉개진 디지털 이미지는 조지아의 풍경을 노스탤직한 감상주의 속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경계 없이 풍경에 녹아드는, 그럼으로써 영화 내의 유령이나 다름없게 느껴지게끔 하는 촬영이랄까. 얼핏 홍상수의 <물안에서>가 그러했듯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방식을 영화에 끌어오는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른 잎>을 바라본다면, 이 영화의 저화질은 고화질의 이미지가 갖는 투명성, 이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관람자(혹은 목격자)의 욕망을 배제하고 이라클리의 시적인 여정에 동참하게끔 하는 시도로 바라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3시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봤음에도 이라클리의 얼굴도, 그와 동행한 레반의 정체도, 그들이 찾던 딸의 정확한 모습도 확인할 수 없는 관객들에게 남는 것은 거대한 원을 그리며 조지아 곳곳의 풍경을 담아낸 하나의 긴 여정일 따름이다. 잘 보이지 않더라도, 스크린 너머의 대상과 우리 사이에 길이 있다는 것만 확신하면 된다, 라고 <마른 잎>은 주장한다.

amFLc9IJ2I61VfQFjdG8K9lDOeQ.jpg

<베이비 인베이전> 하모니 코린 2024

전작 <어그로 드ㄹ1프트>와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또한 아무런 내용이 없다. 사실 이렇다 할 내용 없이 러닝타임을 채워온 것이 하모니 코린의 특징이랄까. 그의 영화엔 언제나 폭력과 범죄가 함께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 구성을 달리할 뿐이라 할 수도 있겠다. <베이비 인베이전>은 “다크웹에서 받은 1인칭 게임을 플레이하는 어느 스트리머”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최근의 데스크탑 무비 장르의 영화들과 같은 서스펜스나 스릴은 없다. <프리 가이>처럼 게임을 다룬 영화가 게임을 중심으로 스트리밍이나 모바일 디바이스 등을 아우르는 미디어스케이프를 보여주는 것과도 구별된다. <베이비 인베이전>을 보며 떠오르는 키워드는 뇌썩음(brainrot), 포스트-인터넷, 베이퍼웨이브, 위장술로서의 생성형 AI, 외로운 늑대로서의 인셀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교한 사회비평 또한 아니기에, 이러한 키워드들은 하나의 실에 꿰이는 알맹이가 되지 못한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해볼 수는 있다. 하모니 코린은 <베이비 인베이전>과 관련한 인터뷰들에서 ‘감각’을 중요하게 이야기했다. 문자 그대로, 이 영화는 관객이 이야기가 아니라 감각을 따라가길 요구한다. 시시각각 변주되는 게임의 규칙이나 목적을 파악하거나 화면 왼쪽을 도배하는 트위치 채팅을 따라가는 것 등은 감상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Baby Invader’라는 이 게임의 목적은 멘션에 사는 부잣집에 쳐들어가 폭력을 행사하고 음식과 돈을 훔치고 (사이드 퀘스트라는 이름의) 장난을 치며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마치 [GTA V]에서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상점을 털거나 행인들을 차로 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게임은 그야말로 무료하고, 인디게임 [LSD]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플레이어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베이비 인베이전>은 AI 알고리즘의 흐름을 따라 숏츠를 넘기는 유튜브 사용자나 의미 없는 밈과 이모지로 가득한 채팅을 남기는 ‘트수’들이 시간을 죽이는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제공한다. 다른 점이라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숏폼 콘텐츠용 BGM이 아니라 Burial이 만든 신나는 음악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랄까.전작에 이어 생성형 AI를 영화 전반에 적극 도입한 것은 이러한 감각적 경험과 결부된다. 끊임없이 모습을 변화시키는 생성형 AI 이미지는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글리치로 가득한 게임 이미지, 베이퍼웨이브 특유의 로우파이한 감성과 거리를 둔다. 하모니 코린은 초창기 생성형 AI 영상이 가져온 불쾌한 골짜기를 고스란히 끌어온다. 무정형의 실시간 이미지로 관객에게 감각되는 이 이미지들은 (물론 종종 영화 속에서 ‘에러’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올라가는 채팅창(이 채팅창도 AI 생성의 결과물이지 않을까)이나 플레이어 캐릭터의 시선을 따라가는 카메라 움직임과 조응한다. 의외로 이 영화에는 사람에게 직접 총을 쏘는 장면(그러한 장면은 대체로 8비트 게임 같은 이미지로 묘사된다)이 없지만, 영화의 특정한 순간들은 우리 두뇌의 기억 알고리즘이 이끄는 연상작용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영화가 제공하는 감각은 마치 바디캠을 단 인셀 테러리스트와 그에 동조하는 채팅들, 그리고 테러리스트가 흡입한 마약으로 인해 보이는 환각을 뒤섞어 제시하는 것만 같다. 유희적 쾌락을 위해 무의미한 범죄를 벌이던 <스프링 브레이커스>의 대학생들이나 아무런 긴장감 없이 마이애미 갱단 사이의 갈등을 열화상 카메라와 생성형 AI 이미지로 뒤덮어 버린 <어그로 드ㄹ1프트>와 같이, 하모니 코린은 다시 한번 우리가 무료해질 때까지 자극을 주입한다. 똑같은 내용의 영상이 서로 다른 TTS와 레이아웃으로 무수한 숏츠 채널에 올라오고 알고리즘이 그것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는 것처럼 말이다.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의 월드프리미어 이후 하모니 코린은 “IShowSpeed는 새로운 타르코프스키”라는 다소 황당한 발언을 내놓았다. <베이비 인베이전>은 그 어처구니없는 발상의 결과물이며, 그렇기에 지금 가능한 방법론으로 그것을 찍는다. 그에게 생성형 AI와 게임 이미지는 과거의 슈퍼8mm 필름이나 VHS 캠코더와 다르지 않다.

20251210_6e3860bb.jpg

<슈퍼 해피 포에버> 이가라시 고헤이 2024

우리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애도의 트라우마를 바라보며 그것을 여러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MUBI에 올라와 있는 작업기에서 이가라시 고헤이는 이 영화가 2018년 사노 히로키와 미야타 요시노리가 쓰기 시작한 줄거리에서 출발했으나 코로나19로 촬영이 지연되어 2023년에야 촬영을 할 수 있었으며, 그 사이에 잠자는 사이 돌연사한 친구의 사연 또한 개입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영화에서도 아내의 죽음이 어떤 연유였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며, 그저 등을 돌린 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언급만 나온다. 의문사 혹은 돌연사에 가까운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것만이 암시될 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물론 개인차가 있겠다만) 갑작스러운 단절과 상실을 가져왔다. 엔데믹이 선언되었다고는 하지만, 떠올려보면 우리가 마스크를 꼭 챙겼어야 했던 기간이 엔데믹 이후 마스크를 벗고 다닌 기간과 비슷하거나 아직 더 짧다. 특히나 <슈퍼 해피 포에버>가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 2018년과 2023년의 간극을 떠올려 볼 때 코로나19라는 요인은 무시하기 어렵다. 감독은 그것으로 인한 작업 지연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더불어 영화 내적으로 코로나19라는 단어나 질병의 언어가 등장하지도 않지만, 카메라에 담긴 풍경에서 그것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거칠게 2023년 여름의 1부와 2018년 여름의 2부로 나뉘는 영화의 풍경에서도 그것을 읽어낼 수 있지 않는가. 마스크를 쓴 호텔 지배인, 망해버린 식당, 다음 달에 문을 닫게 된 해변 관광지 호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관광객의 수, 개방된 테라스에서의 술자리와 ‘밀접접촉’으로 가득한 클럽. 영화는 2023년에 촬영되었고, 그것은 영화 속 2023년과 2018년의 풍경은 다르게 연출되었다는 의미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는 아내 사노가 어떤 이유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돌연사인지, 자살인지, 코로나19인지, 지병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다루는 풍경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영화 속 인물들, 식당, 클럽, 호텔, 관광객들은 우리와 같이 팬데믹의 시간을 살아냈으며, 우리가 경험했던 단절과 상실의 시간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것은 그 감각이다. 영화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남편 사노가 아내 사노에게 사 준 빨간 캡모자가 분실을 통해 호텔에서 노동하던 베트남인 직원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이 그가 그 모자를 쓰고 호텔을 떠나는 모습일 때, 단절 속에서 이루어졌던 비접촉·비대면의 제스처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친구에게 꼬장부리면서도, ‘슈퍼 해피 포에버’라는 유치찬란한 이름의 사이비 세미나에 빠져서라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충격을 여전히 소화하면서 말이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그 시간에 대한 충만한 감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1749111714(1).jpg

<쓸모 있는 귀신> 랏차뿜 분번차초케 2025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편의 발견을 고른다면 이 영화여야 하지 않을까. 고장난 청소기의 A/S를 위해 수리기사를 부른 자칭 '트랜스젠더 지식인'은, 수리기사를 통해 청소기가 귀신에 빙의된 것임을 알게 된다. 수리기사는 공장에서 죽은 노동자가 귀신이 되어 종종 전자제품에 빙의한다고 말해주며, 공장주의 둘째아들 마치의 죽은 아내 냇 또한 그런 귀신이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수리기사는 청소기에 빙의한 냇과 돌아온 아내를 반기는 마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태국의 아이, 교육자, 농부, 군인 등을 담은 부조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광장에 놓여 있던 부조는 광장이 거대 쇼핑몰로 재개발되는 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그 과정에서 파손된다. 태국 민중을 기리는 부조가 철거되고 파손되며 재개발되는, 기억에서 점차 지워진다는 것, 영화는 귀신이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태국의 미신을 적극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다. 다방면으로 서브플롯을 풀어내고 무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대기오염/재개발/퀴어/노동/산재/민주화/정치/학살/결혼/소수민족 등에 관한 논평을 쏟아내는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그것을 한데 엮어내는 솜씨를 선보인다. 귀신에 관한 전통적 민담을 현재의 의제를 풀어내는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는 방식,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연상시키는 미쟝센과 유머코드는 130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집중할 수 있게끔 해준다. 이 정도의 응집력 있는 이야기를 솜씨 있게 풀어내는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KakaoTalk_20251224_014614534.png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

퍼피디아는 왜 프렌치 75 동료들을 배신하고 록조와 결탁했는가. 영화는 두 사람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퍼피디아를 보고 발기하는 록조와, 그의 발기를 부추기는 퍼피디아를 보여준다. 프렌치 75의 혁명은 퍼피디아의 ‘꼴림’으로 실패했고, 백인 우월주의자 유력가들의 비밀 그룹 ‘크리스마스 모험가’에 합류하고자 했던 록조의 계획 또한 그의 흑인 여자 페티쉬로 인해 실패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실패뿐 아니라 죽음의 위협까지 가져올 수 있을 페티쉬로 엮임을 알고 있었을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랑이라기보단) 각자의 꼴림을 실행에 옮긴다. <팬텀 스레드>의 우드콕과 알마가 죽음의 페티쉬를 나누었던 것처럼. 다만 퍼피디아와 록조의 페티쉬는, 각자뿐 아니라 각자의 진영에 치명타를 날릴 무언가에 가깝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전체는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뒤처리라고 할 수도 있다. 퍼피디아는 가정에 구속되지 않기 위해 변절했고, 록조는 자신의 페티쉬를 무마하고자 ‘크리스마스 모험가’ 구성원이 소유한 너겟 공장에서 노동하던 이민자들을 잡아들였다. 두 사람에게 (혁명과 인종청소라는) 이념은 있으나 그것의 작동에 관한 이해는 없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그려내는 무수한 아이러니들, 이 영화의 코미디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은 여기서 초래된다. 그리하여 밥 퍼거슨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실패한 혁명가이자 폭탄 전문가였으며 술과 약에 취해 꼭 기억해야 할 암구호도 잊어버린 채 <알제리 전투>를 돌려보는 사람. 프렌치 75의 첫 작전 묘사에서 그는 퍼피디아에게 작전을 물어보지만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신호에 맞춰 (폭탄이 아니라) 폭죽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는 작전에 참여했다는 쾌감과 퍼피디아에 관한 애정 외에 감지되는 것이 없다. 영화는 프렌치 75의 구성원이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그들의 전사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다소 멍청하게 얼빠진 듯한 디카프리오의 새파란 눈동자를 보며,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어쩌면 실제로 그러할 수도 있다. 그는 퍼피디아의 연인이자 윌라/샬린의 (실제적) 아버지이지만, 퍼피디아의 변절과 록조의 숙청으로부터 탈출할 때 다른 조직원의 도움을 받기만 할 뿐이다. 물론 윌라의 실종 이후에도 마찬가지. 보통의 영화라면 카체이싱의 장소로 채택하지 않을, 기묘한 파도같은 도로에서의 카체이싱 이후 윌라와 재회했을 때, 그가 마주한 윌라는 자신에 의해 구출된 대상이 아니라 퍼피디아-록조가 초래한 난장판 속에서 자립한 주체다. 그들이 만든 전투의 결과물 중 하나인 윌라는 그 다음 전투에 참전하는 누군가가 된다. 밥은, 비록 그가 혁명가로 대우받으면서도 어떤 혁명을 하고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음 전투가 도래할 것이라 망상, 아니 상상하는 누군가로 남는다.

2XJ7W3XFr8TWr0QBc37fZHtSO_Y.jpg

<잠 #2> 라두 주데 2024

"살아있는 것이 멋진 이유는 죽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말로 시작하는 영화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그의 묘비를 한 시간 동안 비춘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는 2022년 1월부터 2023년 1월까지 CCTV처럼 보이는 카메라로 촬영된 앤디 워홀의 묘비를 라두 주데가 자신의 컴퓨터로 보면서 기록한 것들이다. 종종 맥OS로 화면이 녹화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감독은 이 영화가 데스크톱 필름임을 드러낸다. 앤디 워홀이 320분에 달하는 영화 <잠>을 찍기 위해 연인이 자는 모습을 직접 카메라로 담았던 것과 달리, 라두 주데는 거주지인 루마니아에서 대서양을 건너야 있는 미국 팬실베니아의 묘지를 원격으로 목격한다. 영화는 워홀의 묘지를 찾아 사진을 찍거나 아이코닉한 통조림을 헌화하듯 묘비에 올려놓는 사람들을, 풀을 뜯어 먹기 위해 지나가는 사슴과 토끼를, 사계절을 거치며 내리치는 비와 눈을 보여준다. <잠>을 비롯해 <키스>, <블로우잡>, <EAT> 등 앤디 워홀의 영화는 영화 안에서 자고 키스하고 애무하고 먹는 것 등 실제와 연기(가상) 사이에 놓이는 행위들의 존재론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잠 #2>에서 라두 주데는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패러디한다. 아이코닉한 거장의 묘지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앤디 워홀의 '영원한 잠'을 방문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워홀의 작업이 무엇이든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라두 주데는 그것의 죽음 또한 같은 방식으로 다루고자 한다.

zaSoFzmQ_RipYTz_hf9dsuxvrTw.jpg

<페니키안 스킴> 웨스 앤더슨 2025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무언가로 정의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들의 섬> 같은 실책을 예시로 들며 ‘예쁜 화면’에 집착하는, 모든 프레임이 벽걸이 그림처럼 보이길 바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소비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거의 모든 영화는 모험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기차, <문라이즈 킹덤>의 카키 스카우트 캠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호텔’이라는 장소,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속 동물 입장에서 그려진 세계, <애스터로이드 시티> 속 외계인이 출몰하는 사막지대의 소도시.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갖는 배경은 미스테리한 일이 벌어지거나, 어디론가 계속 이동하거나, 무수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충돌하는 장소들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유독 눈에 띠는 것은 클로즈업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클로즈업이 완전히 부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페니키안 스킴>의 클로즈업은 그의 영화가 추구해 온, 그의 이름을 하나의 대명사로 만든 미감과 어긋난다. 얼굴보다 살짝 아래에서 부감으로 촬영된 듯한 클로즈업 숏들은 물리적인 공간들이나 이야기 자체가 아닌 인물들의 얼굴, 특히 코다와 리즐, 누바르의 얼굴을 모험의 장소로 만든다. 그리하여 이번 영화의 주된 배경은 그들의 얼굴이다. 마치 인형처럼 정해진 위치에서 정확히 대사를 내뱉는 듯한 인상의 캐릭터들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얼굴이 영화적 장소로 기능하는 순간을, 한순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형에게 달려드는 누바르나 빠르게 속세를 자신의 신체에 안착시키는 리즐, 이 모든 것을 상대하는 가장 큰 지도와 같은 코다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다. 맞다. ‘페니키안 스킴’을 설명하는 지도는 코다의 얼굴이며, 그것의 작동을 표명하는 거대한 디오라마가 무너지는 순간은 코다의 변화를 감지하게끔 한다. 그렇게 웨스 앤더슨은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난다.

happiness_011752137125.jpg

<해피니스> 피라트 위첼 2025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에 머무르는 연출자가 스마트폰이나 랩톱으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학살 소식을 들으며 불면에 시달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검색하고 일기를 쓰는 형태로 진행된다. 수면유도제나 블루라이트 차단 방법 같은 것을 검색하던 그는 같은 불면 속에서 같은 디스플레이 위에 소셜미디어나 유튜브 속 학살의 소식을 바라본다. 정말로 불면의 원인인 것은 팔레스타인 등에서 자행되는 학살의 이미지와, 그것에 반대하는 유럽의 (주로 이주민과 학생인) 시민들을 강하게 탄압하는 공권력의 모습이다. 디스플레이가 내뿜는 블루라이트가 불면의 원인이며, 스크린을 멀리할 것을 주문하는 의학 칼럼은 이러한 현장을 외면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주문과 다름없다. 모든 이미지가 디스플레이를 통해 우리 앞에 당도하는 디지털-온라인-모바일 시대의 폭력은 우리가 그것을 외면할 때 강해지고 목격할 때 위축된다. 피라트 위첼은 당신 또한 이러한 불면의 순환을 경험해본 적 없는지,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며 담아낸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영화들

opJ4d9g7B6xbyejJb7xVeHeQ8LA.jpg

<하산과 가자에서> 카말 알자파리 2025

c9dOGTwghf6-gP07FRd90rQSia4.jpg

<발레리나> 렌 와이즈먼 2025

JPwnxbcpKpPk8OQEbjlRbNIGtLM.jpg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잭 리포브스키, 아담 B. 스테인 2025

8OaztS9Utm4axeOsIT6XleEULt8.jpg

<블랙 백> 스티븐 소더버그 2025

edYD6C-MM3OD6wd6TXgjTV6048g.jpg

<페라리> 마이클 만 2024

-0Mn75AA7Y7v4wI0IRANGeqEkvo.jpg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

hURTV7NQ9-smrJUH1EKSSAMQyHE.jpg

<도주> 아다치 마사오 2025

-E6ZA9EMOaegLp9oDffJ0AxRAeg

<엘레오노라 두세> 피에트로 마르첼로 2025

16_31_42__67e6505e9310a[H800-].jpg

<올파의 딸들> 카우타르 벤 하니야 2023

IE003485675_STD.jpg

<그 꽃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 테오 파나고풀로스 2024

s4_egnY5Z-QDOetElrUgeADABMI.jpg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

8860eb59-9f89-47fe-ae4e-45df14f4f1e3.jpg

<그저 사고였을뿐> 자파르 파나히 2025

m1_625f35488ec64a.jpg

<밝은 미래> 안드라 맥마스터스 2024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