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영화의 즐거움

<휴민트> 류승완 2025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류승완은 장르영화 감독이다. <베테랑 2>나 <부당거래>, <모가디슈>처럼 다소 첨에한 사회적, 외교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제공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짝패>와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군함도>의 탈출 장면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The Ecstasy of Gold"를 굳이 삽입하던 장르영화 감독으로 나에겐 기억된다. 개인적인 류승완의 최애작이라면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인데, 온라인으로 공개된 단편 <다찌마와리>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1년 앞서 개봉한 김지운의 영화보다도) 만주물과 협객물에 대한 류승완식의 비평이자 패러디이며, 동시에 2010년대 내내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 배경의 영화들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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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옅은 차원에서 세계관을 공유하는 <베를린>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류승완이 무엇에 관심을 둔 (상업영화에 몇 남지 않은) 작가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비디오 키즈로서 류승완은 이두용, 박노식, 김효천 등이 만든 한국 액션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나 <황야의 독수리>, <지평선> 같은 만주물에 대한 애정을 홍콩 무술영화나 할리우드 액션영화만큼이나 애정하는 인물이다. <짝패>나 <다찌마와리>는 그 결과물이었고, <휴민트>는 그 연장선에 놓인다. <베를린>이 정통 첩보물에 기반을 두고자 했다면, <휴민트>에서 첩보는 그다지 중요한 방식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마적, 밀정, 독립군, 만주군, 일본군 등 서로 다른 힘이 경합하는 상상적 지리를 펼쳐내던 만주물의 세계가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다분히 픽션화된 공간(영화 내내 블라디보스토크의 길거리에서 행인이라곤 보이지 않지만 식당은 언제나 가득 차 있다)에 응축된 것에 가깝달까. 실존하지 않은 동남아시아의 도시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혹은 군천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한 <밀수>) 를 떠올리면,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지명은 쓸데없이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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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만주물에서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지명이 주요하게 등장햇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만주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이 공간은 만주물에서 격돌했던 세력들의 힘이 이름만 바뀐 채 반복되는 공간에 가깝다. 국정원, 보위부, 북한 영사관, 탈북민, 러시아 마피아 등등. 사실 정보원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국정원 요원이 주인공이라는 지점에서 <휴민트>는 첩보물이라는 장르를 다소간 내려놓는다. 다분히 현실과 결착된 근작들과 달리, 마약 유통과 인신매매라는 현실의 범죄에서 따온 소재들도 장르와 함께 중요도를 잃는다.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범죄와 그것의 해소를 위한 정보전이 첩보물의 형태라고 할때, <휴민트>는 박건(박정민)의 등장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남은 것은 조 과장과 박건이 채선화에 대해 갖는 각각의 감정, 서로 다른 이유로 그를 지켜야 한다는 순애의 정념 뿐이다. 즉, <휴민트>는 분단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상상될 수 있는 과거 만주물이 지녔던 지정학적 판타지의 성격을 2020년대로 가져온, 기묘한 장르적 혼합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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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엔 여기엔 만주물이 지녔던 이데올로기, 반공이라던가 항일운동과 같은 주제의식은 배제되어 있다. (물론 모든 만주물이 그런 이데올로기에 복무했다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 요원이 한 여성을 두고 협력하는 구도는, 아마도 20~30년 전이라면 통일이나 민족과 같은 단어들로 채워진 비평을 요구받았을 테다. <휴민트>의 채선화는 한반도나 민족의 표상이라기보단, 도리어 그러한 표상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오히려 그의 캐릭터는 박건의 순애보 서사와 맞물려 2000년대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 속 여성 인물들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니까 조성모나 임창정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여성 캐릭터 말이다. 류승완은 웨스턴 속 무법자들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만주물의 무법자들과 <휴민트>의 정부요원들을 비슷한 방식으로(사실 <다찌마와리>에서 이미 했던 방식대로), 그러면서도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낭만적 협객(조폭)의 순애를 뒤섞는 방식으로 빚어낸다. 부패관료와 마피아에 의해 납치된 탈북 여성들이 갇힌 방탄유리 캐비닛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벌어지는, <존 윅> 스타일의 동시대적 액션에서 <첩혈쌍웅> 같은 피칠갑으로 액션영화의 연대기를 거슬러오르듯 펼쳐지는 후반부 액션은 그 클라이맥스를 정확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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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은 액션을 중심으로 여러 장르를 가로지르길 반복한다. 그러한 장르 결합의 매끄럽지 않은 지점들은 흠결이 아니다. 되려 모든 것이 매끄럽게 마감된 <모가디슈>나 <밀수> 같은 근작보단 서로 다른 재료들이 맞부딪히는 류승완의 영화가 흥미롭지 않은가? <짝패>에서 정두홍이 비보이, 야구부, 하키부, 흉기를 든 여고생 등의 집단을 상대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카메라는 정두홍을 따라가며 골목에 쏟아져 나오는 집단들을 담아내고, 그들은 한 순간에 뒤섞인다. 류승완의 영화는 그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섞어 왔고, <휴민트>는 오랜만에 그러한 성격이 드러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