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임> 구로사와 기요시 2024
*팟캐스트 카페크리틱 3월 <차임> 특집을 위해 쓴 리뷰.
<차임>을 보고 <큐어>나 <회로>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테다. 근원을 찾을 수 없는 폭력성의 발화, 사람들 사이로 전염되는 폭력, 그럼으로써 사라진 듯한 인간성 자체. 차임벨 소리와 함께 일종의 명령이 들린다 말하는 요리 학원 수강생 타시로(코히나타 세이이치)는 요리 강사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츠오)와 다른 수강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목을 식칼로 찌르고 죽어버린다. 그를 그저 어딘가 이상한 사람 취급하던 마츠오카와 수강생들에게 타시로의 '이상함'은 전염되는 것만 같다. 마츠오카와 개인 수업을 하던 수강생 아케미(아마노 하나)는 생닭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집어던지고, 마츠오카는 어느 순간 아케미의 등에 식칼을 꽂아 살해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차임>은 러닝타임 45분으로 리메이크한 <큐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차임>을 두고 <큐어>를 비롯한 2000년 전후의 기요시 영화만들 언급하는 것은 어딘가 어폐가 있다. 무엇보다 <차임>이 <큐어>의 귀환이라는 듯 말하는 이야기는 더더욱. 2024년 기요시가 연달아 발표한 세 편의 영화 중 <큐어>와 가장 유사한 영화는 <차임>이 아니라 <클라우드>다. 더물어 <큐어>나 <회로>와 2024년의 세 편 사이에 기요시 영화에도 이미 <큐어>스러움이 묻어 있지 않는가? <도쿄 소나타>의 클라이맥스,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의 이웃집, <산책하는 침략자>의 바디 스내처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면, <차임>은 <큐어>의 귀환이 아니다. 되려 기요시가 오랜기간 반복하는 테마가 변주된 또 한편의 영화로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임>은 무엇을 변주하고 있는가? 우선 여기엔 세계에 혼란을 가져오는 특정한 대상이 부재하다. 마미야, 웹페이지, 수장룡, 납치범, 외계인, 리셀 플랫폼, 혹은 주인공을 뒤쫓아 오는 미친 경비원 같은 것들 말이다. <차임>에는 인물의 성격을 뒤바꾸은 어떤 대상이 없다. 타시로의 죽음 이후 학원을 방문한 형사에게 마츠오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주로 이곳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라앉히러 오니까요. (중략) 그래서 이렇게 위험한 물건들에 둘러싸여도 안전하다 느끼는 겁니다" 이 말을 곧장 뒤집어질 수 있고, <차임>은 그것이 뒤집어진 세계를 묘사한다. 타시로가 말하는 머릿속 소리, 차임벨 소리 같은 것은 무의미한 맥거핀에 다름없다. 사람들 혹은 사회에 이미 내재된 사회병리를 외화시키는 마미야 같은 대상 없이, <차임>의 세계는 폭력이 이미 외화되어 있는 세계나 다름없다. 식당과 두 번째 면접을 마친 마츠오카의 뒤로 한 여성에게 나이프를 휘두르다 제압되는 남성을 보여주는 장면, 얼핏 <큐어>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장면의 작동방식은 차이를 갖는다. 폭력성이 전염된 결과로 벌어지는 폭력과, 전염이 이미 완료된 상태의 세계에서의 폭력이랄까.
마츠오카의 집은 그 세계를 이미 드러낸다. 그의 집안 분위기가 극도로 가부장적이라는 점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집안 사람들의 움직임은 이미 이상하지 않은가? 동아리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웃는 아들이나 식사 중 갑자기 캔을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러 나가는 아내는, 얼핏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다소 어긋난 타이밍에 벌어진다. (그 집에 무수한 캔 쓰레기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아내 역을 맡은 배우가 3인 가정의 기묘한 식사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이사>의 주인공 타바타 토모코라는 점도) 세 가족 각자의 리액션은 뒤늦게 찾아오거나, 서둘러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번째 면접에서 레스토랑 오너와 마츠오카의 동상이몽과 같은, 같은 평면 위에서 살아가지만 근본적인 어긋남을 지닌 사람들. 그러한 세계에서 누군가의 손에 칼이 쥐어졌을 때 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슬래셔 영화에 살인마가 등장하고 갱스터 영화에서 총이 격발되는 것처럼.
그러한 지점에서 <차임>은 <큐어>와 그것을 연상시키는 기요시의 여타 영화들과 조금 궤를 달리 한다. 이를 일본의 사회병리적 현상으로서의 폭력과 같은 분석을 진지하게 덧붙이는 것은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다소 진부하게 느껴진다. <큐어> 혹은 <큐어>에 대한 이야기와 와 달리 <차임>은 현상에 어떤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클라우드>에서 리셀 플랫폼이 병리 현상의 지표이자 시발점 역할을 했다면, <차임>에는 그조차도 부재하다. 그런 맥락에서 <차임>은 이런저런 '사회적' 해석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기요시의 가장 순수한 장르영화 중 한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