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빈스 길리건 2025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팟캐스트 카페크리틱 4월 녹음을 위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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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 미국의 국장에 새겨진 이 라틴어 단어는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라는 뜻입니다.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의 제목은 여기서 따온 것이죠. 바이러스인지 신호체계인지, 여하간 비말 감염을 통해 빠르게 전파된 외계에서 온 '신체 강탈자'는 주인공 캐롤을 포함한 13명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하나의 군체, '하이브 마인드'로 묶어버립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강하게 연상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AI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이 군체는 움직입니다. 과장되게 친절한 말투와 웃는 얼굴은 LLM 모델들의 말투를 곧장 연상시키기도 하고요. 물론 빈스 길리건이 <플루리부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한 게 10여 년 전이라고 하니까, AI를 염두에 둔 채 작성된 각본은 아닐 것입니다. 문필가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는 '에 플루리부스 우눔'을 뒤집은 제목의 에세이 '에 우니부스 플루람'에서 텔레비전이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인식과 감정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핵심 장치이며 포스트모던한 미국 문학이 그것을 반영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월리스의 분석 중 흥미로운 지점은 텔레비전이 근본적으로 아이러니의 매체라는 지적인데요. 텔레비전의 광고, 시트콤, 예능 등은 스스로 자신이 허구임을 반복해서 드러내고, 그덕에 시청자인 우리의 감정구조는 비웃음에 기반한 거리두기나 진지함의 실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텔레비전은 물론 온라인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곧장 진실로 믿는 대신 "주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요. 우리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 으레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고하지 못하고, 나아가 이미 그 안에서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텔레비전 이전의 영화가 영화에 담긴 저 세계를 신뢰함으로써 (적어도 상영되는 시간 동안) 모종의 진실로 기능했던 것과 달리, 지금의 우리는 모든 것을 보며 그것들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플루리부스>는 그 의심의 대상이 우리 앞으로 걸어나오는 사태를 그려냅니다. 캐롤이 군체와 처음 대화하는 순간이 백악관 기자회견실 생중계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캐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인'과 자신의 집 밖을 서성이는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대상을, 텔레비전 안의 허구와 당장 신체를 맞댈 수 있는 실제를 동시에 마주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군체는 캐롤을 '우리'로 만들려 하고, 캐롤은 거부합니다. 9개의 에피소드 동안 캐롤의 선택들은 군체에 속한 개인들을 다치거나 심지어 죽게 하기도 하고, 그것이 세계 자체의 변화와 결부된다는 점에서 '세카이계'의 방법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캐롤이 상대해야 하는 군체라는 허구는, 단지 허구라기엔 이미 캐롤이 놓인 세계 자체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군체는 캐롤을 설득하기 위해 캐롤의 취향에 맞춘 조시아라는 개인을 보냅니다. 이상한 생활을 이어가던 캐롤은 조시아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우리(we)'라는 군체의 주어 대신 '나(I)'라는 주어를 쓸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비록 군체는 캐롤이 거부하는 허구라도, 캐롤과 연애 관계를 맺는 조시아와의 관계는 너무나도 실제인것이죠. 1화에서 감염의 방식으로 키스가 사용된 것을 떠올리면, 둘의 대비가 퍽 재밌습니다. 캐롤이 조시아와 맺는 사적 관계는 군체와 맺는 공적(?) 관계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오지에 숨어 지내던 면역자 마누소스와 달리, 중년의 레즈비언이자 소설가인 캐롤에게 군체는 (생존을 위해서나 조시아를 얻기 위해서나)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고 경계지을 수 없는 전체이며 (연애가 대부분 그러하듯) 지난한 협상을 함께 해나갈 상대입니다. 때문에 <플루리부스>는 AI에 대한 미리 쓰인 우화처럼 읽히면서도 (엔드크레딧에는 "인간에 의해 창작된 드라마"라는 게 명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간 우리의 인식론과 감정구조를 구성해 온 미디어 생태계 전체에 대한 사고실험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캐롤이 마당에 가져다 놓은 원자폭탄이 시즌2에서 폭발할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으니, 이 사고실험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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