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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6. 2017

가족이란 불가항력 앞의 아이들

스위스에서 온 애니메이션 <내 이름은 꾸제트>

 89회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고,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여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내 이름은 꾸제트>를 프랑코포니 영화제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지난 3월 16일 정식 극장 개봉했지만, 자막 버전이 아닌 더빙 버전 상영, 상영관과 시간대 부족 등으로 관람하지 못하다 이제야 영화를 만났다. <내 이름은 꾸제트>는 부모님이 죽고 고아원에 가게 된 아이 꾸제트(가스파 츨라테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가족이란 이름의 불가항력 앞에 놓인 아이들, 자신의 선택이 아닐 수밖에 없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꾸제트이지만, 그가 고아원에 가서 만나게 되는 친구 시몽(폴린자쿠우드)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시몽은 아들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 주유소에서 강도질을 하다 교도소에 투옥된 아버지 때문에 혼자가 되어 고아원에 들어왔다. 덕분에 삐뚤어진 성격을 가진 시몽은, 꾸제트가 처음 고아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전형적인 불리(bully)처럼 행동하며 그를 괴롭힌다. 투닥거리다 보니 친해진 꾸제트와시몽, 하지만 꾸제트가 경찰인 레이몽(미셸 빌레모)에게 입양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딘가 서먹해진다. 결국 시몽은꾸제트에게 “우리 같은 아이에게 다시 가족이 생기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야. 어서 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에서 고통받는 9살, 10살 아이의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을까? 시몽을 통해 그 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가족이란 단어는 참 복잡하고 어렵다. 가족은 혈연의 문제인가, 공동체의 문제인가, 애정의 문제인가? 까미유(시스틴 무하)의 고모는 혈연이란 이유로 까미유를 데려가려 하고, 레이몽의 아들은 스스로 레이몽의 아들에서 벗어나길 선택한다. 레이몽과꾸제트, 까미유는 서로의 동의 하에 새로운 가족이 된다. <내 이름은 꾸제트>는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가족이라는 불가항력 밑에서 다양한 사연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온전한 판단으로 가족을 선택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의해 피해받아야 하는 것이고, 선택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가족, 혈연, 핏줄 같은 단어들로 아이들에게서 선택권을 앗아간 사람들에게 영화의 마지막 대사들은 이야기한다. ‘그 아이가 뚱뚱하든, 바보 같든, 잘생겼든, 키가 작든, 오줌을 많이 싸든, 방귀를 많이 뀌든, 그 아이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당신에겐 책임이 있다.’ 

 가족이란 키워드는 평생을 두고 고민하게 될 문제이다. 함께 살아갈 사람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어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그 선택권이란 없다. <내 이름은꾸제트>의 아이들은 책임감 없는 부모에 의해 그 선택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얻는다. ‘가족 같은’따위의 수식어로 포장되는 공동체가 아닌 ‘가족’이라는 삶과 생활의 동반자를 선택하고, 그에 책임질 수 있냐는 질문을 영화는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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