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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03. 2017

2017 상반기 개봉작 Choice 5

 2017년 상반기는 부족한 6개월이었다. <라이언>, <헥소 고지> 등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은 아쉽다 못해 실망스럽고 끔찍한 영화들이었고, <녹터널 애니멀스>, <컨택트>, <더 큐어> 등 이름 있는 할리우드 감독들의 신작 역시 만족보단 아쉬움을 남겼다. <패신저스>라는 최악의 작품으로 시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미이라>와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라는 최악의 작품들로 마무리되었다. 간혹 <원더우먼>과 같은 작품이 있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나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같은 영화엔 일말에 호감도 가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이 흥행을 기록하기는 했으나 절대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고, 그 밖의 일본 영화들은 언제나처럼 제대로 개봉하지 못해 관람의 기회를 잡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관람한 <행복목욕탕>, <간츠: 오> 등의 작품들 역시 맘 놓고 좋아하기엔 부족한 영화들이었다. 국내 영화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꿈의 제인>처럼 반짝이는 독립영화들이 간혹 있기는 했으나, <더 킹>과 <공조>로 시작한 한국 상업영화는 작품의 퀄리티 자체나 논란이 된 영화 <리얼>로 상반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악녀>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까지 기대보다 아쉬운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해빙>과 <싱글라이더> 등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음을 보여주었지만, 흥행의 측면에서 아쉬움만을 남겼다. 이렇다 할 성취도, 성과도 남기지 못한 한국 상업영화들만 이어진 상반기였다. 그럼에도 관객을 즐겁게 만들고 많은 이야기를 생산한 작품들은 있었다. 척박했던 반년 중에서도 여러 차례 다시 보고 싶어 지던 영화 5편을 골라보았다.

Choice 1. <문라이트> (2016)

감독: 베리 젠킨스

출연: 트레반테 로즈, 안드레 홀랜드, 메허샬레 알리, 나오미 해리스, 자넬 모네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피날레랄까? 장식한 작품상 번복의 주인공이자 작품상을 수상한 첫 퀴어영화인 <문라이트>는 아마 2017년 개봉작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의 리스트에 올라갈 영화일 것이다. 마이애미 흑인 게토에 사는 샤이론이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으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와 비슷한 방법론을 왕가위 영화의 분위기로 담아냈다. 리틀, 샤이론, 블랙의 세 챕터로 구성된 주인공 샤이론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문라이트>를 보고 있자면, 우정과 사랑, 존경과 유산, 이해와 화해를 대사 대신 표정과 이미지로 그려내는 베리 젠킨스 감독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이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법한 메허샬레 알리의 빼어난 연기는 압도적인 지지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흑인 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뛰어난 뮤지션에서 배우로 변신한 자넬 모네의 연기와, 단 3, 4일 만에 모든 장면을 촬영했다는 나오미 해리스의 정확한 연기 역시 <문라이트>라는 영화가 존재할 수 있게 된 큰 힘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샤이론의 세 시절을 연기한 알렉스 R.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레반테 로즈와 샤이론의 친구이자 사랑인 케빈을 연기한 제이든 피너, 자렐 제롬, 안드레 홀랜드가 있었기에 <문라이트>라는 작품이 가능했다. 특히 세 명의 샤이론의 얼굴로 만들어진 포스터를 보고 있자면, 정말로 한 배우가 성장하는 모습을 촬영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Choice 2. <존 윅:  리로드> (2017)

감독: 채드 스타헬스키

출연: 키아누 리브스, 커먼, 루비 로즈, 로렌스 피시번


 올해도 이런저런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이 쏟아졌지만, <존 윅: 리로드>만큼 목적에 충실한 영화는 없었다. 크게 호평받은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제작된 <존 윅: 리로드>는 소년만화적인 세계관을 좀 더 흥미롭고 디테일하게 설정하고, 액션의 판을 키움과 동시에 유머를 집어넣어 오락적인 카타르시스를 충족시켜준다. 버스터 키튼의 걸작 액션 영화인 <셜록 2세>를 건물 외벽에 영사하고,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가 아래로 빠르게 틸팅하자 오토바이를 타며 스턴트를 벌이던 버스터 키튼이 건물 밑으로 떨어진 것처럼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마치 '버스터 키튼의 적자는 이 영화를 만든 우리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프닝이다. 이어지는 카체이스와 근접격투 액션, 권총을 이용한 발레처럼 보이는 액션과 온갖 총기들이 난무하는 박력 넘치는 로마 지하수로에서의 추격전, 이소룡의 <용쟁호투> 속 거울의 방을 연상시키는 후반부까지 액션 영화의 팬이라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존 윅(키아누 리브스)과 카시안(커먼)이 소음기를 단 권총으로 총격을 주고받는 장면은 올해 최고의 액션-코미디 씬으로 손색없다. 액션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완급을 조절하는 솜씨는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이 액션 오락영화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Choice 3. <로건> (2017)

감독: 제임스 맨골드

출연: 휴 잭맨, 다프네 킨, 패트릭 스튜어트, 로이드 홀브록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로건>은 올해 최고의 블록버스터로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엑스맨 프랜차이즈의 (<데드풀>을 제외한다면) 첫 R등급 영화이자, 17년 동안 9편의 영화에서 울버린을 연기한 휴 잭맨의 마지막 울버린 작품이고, 때문에 당연하게도 마지막 울버린 영화이다. 앞선 두 울버린 영화가 아쉬웠던 만큼 R등급으로 돌아온 <로건>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고, 공개된 결과물은 팬들의 기대치를 능가하는 걸작으로 남았다. 슈퍼히어로 서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부극의 서사와 분위기를 가져와 (영화 속에서 <셰인>을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한다) 근미래 SF 판타지 설정에 녹여낸 <로건>은 단순히 한 캐릭터와의 작별만을 담아내지 않는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완벽한 자리이자, 존경과 애정이 뒤섞이고, 가족과 공동체의 한 세대를 결산하는 이야기. 슈퍼히어로 장르에 있어서 처음으로 온전히 마무리된 캐릭터이자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 단순히 울버린의 R등급 액션만을 기대했다면, <로건>은 그것을 능가하는 울림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Choice 4. <엘르> (2016)

감독: 폴 버호벤

출연: 이자벨 위페르


 암전 된 화면에서 한 여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들어오자 관객은 그것이 합의된 관계의 소리가 아닌 폭력적인 강간에 의한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복면을 쓴 괴한이 물러가자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차분하게 부서진 집기를 치우고 찢어진 옷을 버린 뒤, 몸을 씻고 아들과의 저녁 약속을 준비한다.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하는 폴 버호벤의 신작 <엘르>는 미셸이라는 한 인간의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결을 탐구하는 블랙코미디이자 스릴러이다. 기본적으로 강간범이 누구인지를 찾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취하는 <엘르>는 종종 목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영화 중반부 미스터리 속의 범인을 공개해버리는 등 기본적인 상식과는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여기서 드러나는 미셸이라는 사람은 여성이자 강간 피해자이고, 전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연쇄살인마 아버지의 딸이자 철부지 어머니의 딸이고, 게임회사의 사장이나 남초 집단 속의 여성으로 존재한다. 젠더 권력을 비롯해 사장이라는 지위와 부르주아라는 사회적 계층 등 다양한 권력구도 속에서 미셸이라는 캐릭터는 이를 따르다가도 뒤집고,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행위와 언행을 하기도 하며, 자신의 쾌락과 목적에만 충실하기도 하다. 이자벨 위페르를 페르소나 삼았던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처럼 인간의 다양한 결을 탐구하며 조롱하기도 하는 <엘르>는 폴 버호벤이 유럽으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결과물로 보인다.

Choice 5.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7)

감독: 홍상수

출연: 김민희, 서영화, 권해효, 송선미, 정재영, 문성근


 2010년대에 들어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조금씩 변화를 보여왔다. 유머의 비중이 늘어나기도 하고, 섹스씬이 사라졌으며, 영화의 시간축 자체를 소재로 삼아 이를 비틀고 변형하고 충돌시켜왔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주인공 영희를 연기한 김민희와의 스캔들과 함께 생각해도, 그것도 떨어져 생각해 봐도 홍상수의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지 않을까? 사랑 어쩌고 하며 여자들에게 구애를 하며 치근덕대는 남성 캐릭터들은 여전하지만, 김민희의 영희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감정으로 그들을 찍어 누르는 광경은 홍상수의 작품에서 처음 목격하는 장면이다. 더군다나 홍상수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정재영, 문성근, 권해효 등이 연기하는 지질한 남성들을 김민희가 찍어 누르는 광경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작품이 홍상수의 가장 자기파괴적인 영화라는 평을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더군다나 직접적인 상징(검은 옷의 남자)나 1부에서 등장하는 익스트림 롱 숏 등 그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을 요소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거친 홍상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케 만든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이어 칸에서 공개한 <그 후>와 <클레어의 카메라>까지 올해만 세 편의 영화를 공개한 홍상수의 다음 영화들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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