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극단 연우무대의 입단해 연기를 시작한 송강호는 여러 연극과 단편영화에 출연하다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스크린에 데뷔한다. 이후 이창동의 <초록물고기>(1997), 송능한의 <넘버 3>(1997) 등의 깡패 연기로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으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김지운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7)과 한국 첫 블록버스터로 불리는 강제규의 <쉬리>(1998)를 통해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다. 이후 김지운의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7), <밀정>(2016),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쥐>(2009), <청출어람>(2012, 단편),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페르소나 역할을 해왔다. <괴물>과 <변호인>(2013)으로 두 편의 천만영화의 주연을 맡기도 했고, 주연작의 흥행 스코어만으로 누적 관객수 1억을 돌파한 첫 배우이기도 하다.(최근 황정민이 두 번째 1억 관객수를 돌파했다) 현재 활동하는 배우 중 한국을 대표하면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관객이 송강호를 꼽지 않을까? 송강호는 개인적으로도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성 배우이기도 하다. 캐릭터에 완벽히 동화되는 집중력과 사소한 디테일 하나 놓치는 법이 없는 기억력 등은 송강호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강점이다. 현재 <택시 운전사>(2017)의 개봉을 앞두고 있고, 우민호의 <마약왕>(2018), 원신연의 <제 5열>(2018)을 촬영 중이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도 역시 주연으로 참여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뷔 21주년을 맞은 송강호의 필모그래피에서 기억해야 할 영화 5편을 골라보았다.
Choice 1. <살인의 추억> (2003)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김상경, 변희봉, 박해일
송강호와 봉준호의 첫 합작이 되는 작품이다. 국내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자 미제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큰 틀은 수사극의 형식을 따르지만 시대에 대한 봉준호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박두만 형사는 80년대 한국 사회를 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형사의 감'을 중시하는 수사, 폭력적인 취조 방식, 일단 잡아보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범인 검거, 한술 더 떠 범인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르는 모습까지 무책임하며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그가 거대한 시멘트 공장 앞에 서고, 기차가 달려 지나가는 어둡고 깊은 터널 앞에 서는 장면의 송강호는 당시 한국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던, 제대로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사건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모습을 온몸으로 연기해낸다. 때문에 그와 짝을 이루는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점점 비이성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박두만이 점점 이성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사회가 변화되어가는, 혹은 사회에 변화를 촉구하는 봉준호의 메시지로도 읽힌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사건 장소로 되돌아온 박두만이 무언가를 목격한 듯 카메라를 쳐다보며 끝나는 영화의 엔딩은 지난 과오의 목격이자 자각이 된다. <살인의 추억>을 위해 시대를 온몸으로 연기해내는 송강호의 모습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Choice 2. <박쥐> (2009)
감독: 박찬욱
출연: 송강호, 김옥빈
송강호와 섹시함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특히나 '사제복을 입은 섹시한 송강호'라는 문장이 그렇다. <박쥐> 이전의 송강호는 깡패이거나(<초록물고기>, <넘버 3>, <우아한 세계>(2007)), 소시민이었다.(<효자동 이발사>(2004), <괴물>, <밀양>(2007)) 이랬던 송강호가 신부를 연기하는 데다가 심지어 뱀파이어가 된다. 게다가 영화의 원작은 에밀 졸라의 에로틱한 소설『테레즈 라캥』이고, 연출은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박찬욱이다. 지극히 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 속에서 피에 갈증을 느끼는 뱀파이어처럼 욕망에 갈증을 느끼는 한 인간을 연기하는 송강호의 모습은 굉장히 색다르게 느껴진다. 섹시한 송강호라는 비주얼적인 측면과 더불어, 뱀파이어라는 장르 속의 송강호는 어색하게 느껴질 것 같지만 그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그의 욕망에 동참하게 된다. <박쥐>는 송강호가 연기하는 상현의 참회와 욕망으로 시작하여 태주(김옥빈)의 욕망으로 전이되고, 이를 다시 억누르는 상현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러브스토리이다. 송강호와 김옥빈이 주고받는 욕망의 연기와 박찬욱이 그려내는 서늘한 푸른색과 핏빛이 뒤섞인 영상을 보고 있자면 그저 놀랍고 아름답기만 하다.
Choice 3. <의형제> (2010)
감독: 장훈
출연: 송강호, 강동원
송강호와 강동원의 조합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지어 꽤나 형제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영화 <의형제> 속 송강호와 강동원의 모습은 캐스팅만으로 신선한 느낌을 준다. 간첩 소탕작전에 실패한 이한규(송강호)는 쫓겨나듯 은퇴하여 소시민적 삶을 살아간다. 송강호의 전작들에서 비슷한 느낌을 찾아보자면 <우아한 세계>의 강인구와 같은 느낌이랄까. 아득바득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게 북에서 내려온 간첩 송지원(강동원)이 찾아오고 서로가 버려진 신세인걸 모른 채 의형제의 정을 쌓게 된다는 게 <의형제>의 줄거리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 병사 오경필로 출연했던 송강호이기에, 국정원 요원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색다르게 다가온다. 이런저런 송강호의 전작들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이지만, <의형제>의 송강호는 앞선 송강호와도 또 다르다. 분단이라는 소재를 끌고 와 결국 두 소시민 간의 우애를 다루게 되는 <의형제>의 이야기는 어딘가 판타지적이지만 송강호의 연기는 이를 현실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의외의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내는 강동원과의 합은 송강호가 포용하는 상대 배우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Choice 4. <설국열차> (2013)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고아성,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봉준호의 첫 해외 영화이자 송강호의 첫 해외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송강호가 영어로 대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서구권 국가의 배우들을 한 프레임 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설국열차>의 매력포인트 중 하나로 다가온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이 80년대 한국 사회를 담아내고, <괴물>의 박강두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아이러니를 몸으로 받아내는 역할이었다면, <설국열차>의 남궁민수는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드러낸다. 딸 요나(고아성)와 폭탄을 만들 물질을 모으며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함께 열차 엔진칸으로 전진하는 보안설계자 남궁민수는 스스로가 시스템 전복의 열쇠가 된다. 자신의 자식 세대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만들겠다는 남궁민수의 의지는 열차의 탈선과 전복으로 인해 표출된다. <괴물>의 현서가 괴물 속에서 태주를 안고 살아남게 만들었다면, 남궁민수는 설국열차라는 괴물 속에서 요나를 끌어안고 그를 살린다. 봉준호의 영화 속에서 기차라는 거대한 미래 앞에서 무력했고, 괴물에게서 딸을 구해내지 못했던 송강호는 마침내 기차라는 괴물 속에서 자신의 딸을 구해낸다. 봉준호 영화 속 송강호는 이렇게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냈고,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며 첫 종지부를 찍는다.
Choice 5. <변호인> (2013)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 임시완,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아마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고 할 때 선뜻 나선 배우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물론이고, 이를 온전히 연기해낸다는 것 또한 크나큰 과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송강호의 <변호인> 캐스팅은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가능케하는 만능열쇠와도 같다. 노 전 대통령의의 젊은 시절과 외모적으로도 전혀 닮지 않은 송강호라는 캐스팅은 약간의 모험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변호인>에 앞서 개봉한 <설국열차>와 <관상>이 모두 900만을 넘는 흥행을 기록하자 노 전 대통령을 연기할 송강호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의 연기는 보란 듯이 성공적이었다. 송강호 특유의 소시민적 연기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을 말하며 울분을 토해내는 법정 시퀀스까지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스크린 데뷔작이었던 임시완을 비롯해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등 모든 배우의 연기가 좋았지만, 송강호가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던 기획에 가까웠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