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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6. 2017

기술이 만들어낸 영화의 숭고미

리부트 트릴로지의 최종장 <혹성탈출: 종의 전쟁>

*스포일러 포함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의 3막이 끝났다. 인간과 동일한/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유인원 시저(앤디 서키스)가 탄생하고(<진화의 시작>), 인간 스스로가 만든 사미안 플루 바이러스로 인해 자멸한 세상에서 공생을 꾀하다 실패하던(<반격의 서막>) 유인원과 인간은 마침내 누가 지구에 남는 종이 될 것인지를 논한다. 오리지널 <혹성탈출>(1968)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와 함께 끝나는 <종의 전쟁>은 시저라는 한 개인의 서사시를 완성한다. 영화의 모든 시퀀스에서 유인원이 등장하는 만큼 철저히 디지털 덩어리인 <종의 전쟁>은 <벤허>나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고전 대서사극의 방식을 따른다. 성장-위기-결말의 3막 구조를 따르는 <혹성탈출> 리부트 트릴로지를 한 편의 영화로 놓고 본다면, 러닝타임이 3시간에서 많게는 대여섯 시간에 이르는 고전 서사극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특히 <종의 전쟁>의 편집과 촬영, 음악의 사용은 굉장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활용된다. CG로 완성되는 디지털 시네마와 편집/촬영이라는 영화의 기초적인 구성 요소의 조합은 <반지의 제왕>, <킹콩>, <아바타> 등을 거쳐 <혹성탈출> 리부트 트릴로지를 통해 어떤 완성을 꾀한다.

 영화는 대령(우디 해럴슨)의 부대가 숲 속에 숨어있는 시저의 유인원 부족을 발견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올해 관람한 전쟁 장르 영화 중 가장 빼어난 전투 장면으로 꼽을만한 이 장면은 앞선 <반격의 서막>을 요약하고 <종의 전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공생은 다시 시도해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고, 인간을 선제공격한 유인원 코바(토비 켑벨)를 따르던 몇몇 유인원은 인간의 하수인으로 활동한다. 군인들의 헬멧에 쓰여진 “좋은 유인원은 죽은 유인원뿐이다(The Only GoodApe As A Dead)”와 같은 문구는 <지옥의 묵시록>을 고스란히 연상시키며(후반부 수용소 장면에서 Ape-pocalypse Now라는 <지옥의 묵시록>의 원제 <Apocalypse Now>를 패러디한 문구도 등장한다) 두 종족 사이의 깊은 증오와 갈등을 드러낸다. 산의 밑에서 산 위로 올라가는 군인들의 동선과 전투 장면을 아래에서 위로 훑는 카메라는 “인간은 자연에 도전했고, 그 결과물로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대령의 해석을 고스란히 재현한다(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아래서 위로 향하는 수직 방향의 운동으로 포착한 장면은 눈사태로 군인들이 괴멸되는 후반부를 통해 역전되어 반복된다). 군인이 유인원을 습격할 때 사용한 첫 무기가 총이나 폭탄이 아닌 화살이었다는 점은 (대령이 말하던) 인간성이 원시성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인 이 전투 이외에 유인원과 인간의 전면적인 전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는 전작 <반격의 서막>에서 이미 보여준 유인원-인간의 전투를 반복하는 것에서 오는 피로감을 방지하고, 시저 개인의 서사로 영화를 집중시킨다.

 전투 끝에 유인원이 승리하고, 사로잡은 몇 병사와 그들을 돕던 한 유인원은 본래 있던 공간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전작에서 코바를 죽임으로써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배신한 시저는 영화 중반부까지 이러한 자비로움을 강조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려 한다. 코바에게 전쟁의 손길을 건네 인간들을 선제공격하도록 유혹하고, 이를 시저의 손으로 코바를 죽임으로써 마무리 짓게 만든 것에서 오는 증오는 <종의 전쟁>에서 시저의 서사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사로잡은 군인을 놓아준 시저는 자신의 자비로움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대령을 마주할 때도 자비를 베푼 자신과 그렇지 못한 대령을 비교하며 우위에 서려하고, 유인원인 자신이 인간의 폭력적인 모습을 획득하는 것과 거리를 두려 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묻어두려 한다. 대령은 이러한 시저의 증오를 꿰뚫어보고 자극한다. 시저의 아내와 아들을 죽여 시저를 자극하고, 자신은 인간과 다르다며 감춰온 증오를 겉으로 드러내게 만든다. 시저가 배신한 유인원을 죽인 뒤 코바의 환영을 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죄책감의 표출이며, <종의 전쟁>이 시저의 개인적인 서사임을 확고히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코바의 배신으로 촉발된 시저의 증오와 죄책감으로 서사를 이끌어가고, 그 여정을 유인원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관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시키는 것은 메살라에게 배신당한 유다 벤허의 여정을 떠올리게 만든다(게다가 유다 벤허를 연기한 찰턴 헤스턴은 1968년 <혹성탈출>의 주인공이었다).

 때문에 영화는 자신의 무리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시저 자신은 증오심을 해소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어느 부대의 뒤를 쫓아 대령의 군대가 머무르는 수용소로 향하는 여정은 시저가 유인원의 리더라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개인으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다. 자신이 죽인 인간의 딸(로 추정되는) 노바(아미아 밀러)와 결국 동행하게 되는 것과, 우연히 만나게 된 유인원 배드(스티브 잔)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증오를 고백하고 실행에 옮기는 모습은 한 개인으로써 시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진화의 탄생>은 리더의 탄생이었고, <반격의 서막>은 종의 생존을 위한 리더의 활약상이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쌓인 시저의 개인사는 무리를 떠나 수용소로 향하는 여정을 통해 풀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언어의 사용이다. 모든 유인원이 영어 등 인간의 언어를 목소리를 통해 발화할 수는 없다는 게 영화의 설정이다. 다만 몇몇 장면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유인원이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유인원 사이의 많은 대화는 영어가 아닌 수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시저가 무리를 떠나 여정을 함께하는 멤버들의 언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롭다. 시저는 영어와 수화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모리스(카린 코노발)와 로켓(테리노터리), 루카(마이클 애덤스웨이트)는 간헐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수화를 통해 대화한다. 인간인 노바는 바이러스로 인해 영어를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시저의 무리를 만나 유인원의 수화를 하나씩 배워간다. 시저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던 유인원인 배드는 인간을 통해 조금씩 주워들은 어설픈 영어를 구사한다.


 이러한 언어 구성은 유인원이 주인공인 작품의 당연한 선택임과 동시에 탁월한 선택으로 작용한다. 수화로 풀어내던 것을 시저가 영어로 발화하면서 극의 완급조절을 하거나 전개 속도를 조정하기도 하고, 전개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때문에 시저와 그의 무리, 노바, 배드가 함께 대화하는 자리는 소통과 소통의 부재가 동시에 일어난다. 시저와 유인원의 수화를 배드와 노바는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고, 수화를 배워가는 단계인 노바의 발언은 지극히 제한적이기도 하다. 모든 문장을 현재형으로 말하며 조동사를 사용할 줄 모르는 배드의 언어는 시저의 감정을 자극해 행동을 유발하고, 조금씩 수화를 배워가는 노바의 언어는 자그마한 유대감과 연대의 신호로 작동한다. 미숙한 언어로 대화하며 감정과 고민을 공유하고, 각자의 언어를 습득해가며 시저의 내면을 드러내는 연출과 각본은 이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수용소에 붙잡히게 된 이후의 시저는 메시아의 고난과 유사하다. 다만 예수의 고난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유다 벤허의 고난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약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시저의 고난은 자신의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문에 시저가 십자가 대신 X자로 세워진 나무 기둥에 묶이고, 목숨을 위해 자신의 동족을 배신하길 강요받는 장면들은 개인적인 증오심과 코바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다. 고난과 함께 수용소에 붙잡힌 유인원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한번 리더로 서게 되는 시저의 모습은 <혹성탈출> 리부트 트릴로지의 3막이자 <종의 전쟁>의 3막으로 그려진다. 시저에 맞서는 대령은 사미안 플루의 후폭풍이 발병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생존법이라고 생각하며 광기를 키워간 인물이다. 대령은 “당신이 내 아내와 아들을 죽였다”는시저의 말에 “나는 바이러스가 발병한 아들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응수한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누구의 증오와 죄책감이 더욱 무거운지를 논하기 위함은 아니다. 대척점에 서 있지만 종족의 생존을 놓고 각자의 신념을 조금씩 갉아먹게 된 둘의 이야기는 그것을 회복하는 자가 생존한다는 결말을 통해 해소된다. 지하 땅굴을 통해 모리스와 로켓이 수용소에 침투하고 유인원들을 구해내는 후반부는, 인간성을 자처하면서 인간성을 저버리고 생존을 위한 굉기라는 새로운 신념을 내세운 대령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노바의 인형을 통해 옮은 바이러스로 인해 대령 역시 언어를 잊어버리고, 대령을 죽이기 위해 온 시저는 그가 권총으로 자결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와준다. 생존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동족을 죽이기까지 한 코바의 모습이 인간으로 다시 되돌아온 모습의 대령이 자결로 최후를 맞이하고, 시저가 이를 지켜보는 장면은 시저가 자신 속의 증오와 죄책감을 지워내는 모습이다. 언어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대령을 본 시저의 증오는 연민으로 대체되고, 대령이 자살한 이후에야 시저의 사적인 감정이 마무리된다. 시저는 그제야 온전히 리더로서 행동하며, 자신의 무리에게 연민의 방향을 옮겨간다.

 이러한 서사를 가능케 한 첫 요소는 당연하게도 놀라운 기술력이다. 앞선 두 편의 영화 역시 관객을 충분히 감탄하게 만들었지만, <종의 전쟁>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완성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소통과 소통의 부재가 공존하는 <종의 전쟁>에서 언어는 종종 유인원의 표정으로 대체된다. 숏-리버스 숏의 대화 장면 속 클로즈업은 앤디 서키스라는 빼어낸 배우의 표정을 주름 하나 놓치지 않고 시저의 얼굴로 재현해낸다. 아니, 마치 앤디 서키스가 시저의 얼굴로 페이스오프 한 것과 동일한 수준의 묘사를 보여준다. <진화의 시작>에서 어린 시저가 윌(제임스 프랭코)의 집을 누비던 장면의 묘한 이질감이 <종의 전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저를 비롯한 수많은 유인원과 물, 눈, 산 등의 자연물은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간다. 온전한 클로즈업이 가능해진 퍼포먼스 캡처 기술력은 인물의 표정과 이를 담아내는 숏-리버스 숏 만으로도 대화와 감정을 도출해낸다.


 이러한 최첨단의 기술은 영화의 기초이면서 120년 넘게 연구돼온 촬영과 편집의 자유로움을 보장한다. 초록색 천막으로 가득한 텅 빈 세트 대신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과 동일한 세트 혹은 로케이션 촬영을 가능케 하는 지금의 퍼포먼스 캡처 기술은 앞서 언급한 클로즈업과 줌을 비롯한 각종 움직임의 자유도를 향상한다. 세트가 지닌 물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퍼포먼스 캡처를 수행하는 배우와 카메라의 자유도를 보장하는 기술력은 오랜 세월 영화가 쌓아온 영화의 기초를 <종의 전쟁>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가령 대령의 허벅지에 놓인 권총을 따라가던 스테디캠이 쇠창살 안에 갇힌 시저의 얼굴로 줌인하는 장면, 땅굴을 파던 모리스가 배드의 부름에 달려가고 벽에 난 틈에 카메라가 줌인하자 물이 새어 나오는 장면 등은 디지털로 만들어지는 캐릭터와 실제로써 존재하는 세트/배우의 물성 사이에 카메라가 어색함 없이 끼어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장면은 줌인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의 상황 혹은 감정을 강조하고, 프레임의 내부로 들어가 극 중 인물은 모르는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함으로써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동시에 대령을 비롯한 군인들이 시저의 무리가 사는 동굴로 침투하는 초반부, 암전된 화면을 가로지르는 초록색 레이저 포인터의 활용은 그래픽을 동원하지 않은 채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인상적인 장치이다. 맷 리브스 감독은 기술을 통해 얻은 자유도와 아날로그적 연출의 자양분을 번갈아 사용하며 140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이끌어간다. <다크 나이트>의 한스 짐머와 MCU의 브라이언 타일러, 마이클 지아치노가 만들어낸 할리우드 상업영화 음악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타악기와 관악기를 중심으로 사용한 음악은 <종의 전쟁>이 가진 고전적 서사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후반부의 전투와 이어지는 눈사태 이후 살아남은 시저의 표정은 죽은 시저의 아들 파란 눈(맥스 로이드-존스)이 찾은 생존할 수 있는 땅(머나먼여정임을 강조하며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했다고 알린 뒤 대령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푸른 눈의 모습은 마라톤 평원을 달려 승전보를 알리고 죽은 병사와 같은 희망의 전령으로 기능한다)으로 떠나는 유인원 무리의 모습과 디졸브 된다. 아래서 위로 수직상승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수직하강하는 이미지의 눈사태로 인해 괴멸되고, 여기서 생존한 시저의 압축적인 표정이 희망의 땅으로 떠나는 유인원 무리의 모습과 겹쳐지는 순간은 우에서 좌로, 동에서 서로 희망과 생존을 찾아 이동하는 서부극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이것이 다시 한번 디졸브 되어 오아시스(1968년 <혹성탈출>에서 찰턴 헤스턴의 우주선이 추락한 그곳)에 도착하고 옆구리에 입은 상처로 주저앉은 시저의 모습과 겹쳐지는 장면은 숭고함을 더한다. 길게 늘어진 디졸브는 세 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여정을 마무리하는 서사시의 마침표가 된다. 관현악과 합창이 더해진 음악과 함께 아들 코넬리우스(1968년 <혹성탈출>의 주인공인 유인원의 이름이 코넬리우스이다)와 노바, 배드의 모습을 보며 최후를 맞는 시저의 모습은 50~60년대 할리우드 대서사극의 마지막과 유사하다. CG로 그려진 오아시스와 태양,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임무를 끝내고 최후를 맞이하는 시저의 숭고함은 스필버그가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 보여준 디지털 시네마에 대한 믿음과 유사한 감동을 준다. 그와 완전히 같은 감동은 아닐지라도, 영화의 숭고미를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종의 전쟁>은 디지털 시네마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영화가 오랜 시간 쌓아온 기법과 이에 자유도를 달아준 디지털의 만남은 <혹성탈출> 리부트 트릴로지를 통해 또 다른 완성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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