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저링 유니버스의 새 작품 <애나벨: 인형의 저주>
제임스 완의 <컨저링>으로 시작한 ‘컨저링 유니버스’의 4번째 작품이다. 극 중 시간 순서로는 가장 앞선 시대에 위치한 작품이며, 전작 <애나벨>의 프리퀄인 형식을 취한다. 인형에 애나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 인형에 악마가 깃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여러 단편 작품과 그중 한 편을 장편화한 <라이트 아웃>을 통해 호러 장르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데이비드 F. 샌드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시끄러운 호러 영화를 보면서도 잠들 수 있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들어준 <애나벨>은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지만, 연출자의 재능이 한껏 발휘된 이번 작품은 컨저링 유니버스의 작품 중 (<인시디어스> 시리즈까지 포함해도) 가장 공포에 충실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서프라이즈 시퀀스를 잔뜩 집어넣어 공포감을 조성하는 대신 관객을 놀라게 함으로써 공포를 느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여타 호러 영화들과는 다르게,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관객을 놀라게 할 타이밍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공포감을 조성한다. 8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밀도 있게 소재를 이끌어가던 <라이트 아웃>에 비해 109분의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여름 한 시즌을 족히 보낼 수 있는 웰메이드 오락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전작보다 24년 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인형을 만들어 파는 사무엘(앤서니 라파글리아)과 에스더 멀린스(미란다 오토) 부부는 딸 비(사마라 리)를 교통사고로 잃고 만다. 그로부터 12년 뒤, 멀린스 부부는 과거를 잊기 위해 소녀원의 고아 소녀들을 집으로 들인다.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가 마비된 재니스(탈리타 베이트먼)를 비롯해 그의 단짝인 린다(룰루 윌슨) 등 6명의 소녀와 그들을 지도하는 수녀 샬롯(스테파니 시그만)이 멀린스 부부의 집에서 살게 된다. 건강이 악화된 에스더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사무엘은 비가 쓰던 방문을 잠근 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다. 어느 날, 재니스는 비의 방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방 안에서 우연히 흰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찾게 되고, 인형과 연관된 것 같은 초자연적이고 사악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애나벨: 인형의 저주>가 공포를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인형이 움직이는 장면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형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영화들에서 으레 등장하는, 목이 돌아가거나 인물을 향해 공포스럽게 걸어오거나 표정을 바꾼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없다. <토이 스토리>에서 우디가 목을 돌리며 말을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던 시드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인형 혹은 장난감이 공포의 소재가 되는 이유는 움직여선 안 될 것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애나벨: 인형의 저주>는 이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인형이 움직이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인형과 그것으로부터 숨은/그것을 지켜보는 인물을 숏-리버스 숏으로 담아내며 인형이 움직였음을 관객에게 통보한다. 인형이 움직이는 순간은 관객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는 인형이 등장한 순간부터 영화의 마지막까지 애나벨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인형을 움직이는 악마의 존재는 어둠 속에 남겨둔 채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인형을 집요하게 보여줌으로써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진득하면서도 날카롭게 조성된 사운드와, 탈리타 베이트먼(이번 영화 최고의 발견이다)을 비롯한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감독의 의도를 말끔하게 수행한다.
다만 호러 영화 치고는 조금 길게 느껴지는 109분의 러닝타임은 어딘가 늘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한 작품으로써 전작들의 설정과 이야기의 통일성을 맞추기 위해 늘어난 부분들이 아닐까 싶다. 가령 <애나벨>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엔딩은 시리즈를 본 관객이라면 알아챌 수 있는 포인트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장면이다. 쿠키영상을 통해 이 장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악마의 얼굴이 드러나는 찰나의 한 두 쇼트이다. 철저히 어둠 속의 존재로써 인형을 움직이던 악마의 얼굴이 분장한 배우의 얼굴임이 드러나는 순간은 0.1초 단위의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드러나서는 안 될 영화의 치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은 순간적으로 공포로의 몰입을 깨트린다.
몇몇 단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우스 호러와 오컬트라는 하위 장르는 한국의 관객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장르도 배경도 아니다. 심지어 이름이 알려진 배우가 단 한 명이라도 출연하는 것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자신의 목표를 알고, 목표를 수행하며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더군다나 <맨 인 더 다크>와 같은 소수자를 손쉽게 괴물화/악마화함과 동시에 소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작품이 큰 호평을 받는 (나도 처음엔 호평을 보냈지만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불쾌한 작품이다) 지금의 메이저 호러 영화판에서, 이러한 성향을 가장 적게 드러내면서도 효과적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데이비드 F. 샌드버그와 같은 감독의 존재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