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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8. 2017

합리적인 따뜻함이라는 넌센스를 기어코 선보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희망의 건너편>

*스포일러 포함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관람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희망의 건너편>은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한 시리아 출신의 난민 칼레드(세르완 하지)와 의류 도매업을 접고 식당을 인수한 핀란드인 비크스트롬(사카리 쿠오스마넨)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헬킹키의 한 항구에서 화물선에 실린 석탄더미를 비집고 칼레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도시에 도착하고 곧바로 경찰서를 찾아가 망명 신청을 한다. 망명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보호소에 머무는 그는 시리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다닌다. 이혼한 남성인 비크스트롬은 어딘가 지루해 보인다. 의류 도매업이 돈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보이자 남은 의류를 땡처리한 뒤 그 돈을 들고 카지노를 찾아간다. 가볍게 큰돈을 딴 그는 ‘황금 맥주잔’이라는 식당을 매입한다. 각기 진행되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칼레드의 망명 신청이 기각되고, 보호소를 떠난 그가 우연히 비크스트롬을 만나게 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된다. 비크스트롬은 핀란드어도 할 줄 모르고 영어로 간신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칼레드를 식당의 직원으로 고용하고, 지하 주차장의 창고이지만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며, 현금이 없다는 그에게 월급을 미리 가불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비크스트롬의 행동은 단순한 온정과 선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인수한 식당을 운영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한편 도시의 스킨헤드 네오나치들은 칼레드가 눈에 띄자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희망의 건너편>은 합리적인 따뜻함을 이야기한다. ‘합리적’과 ‘따뜻함’,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언뜻 넌센스 같아 보이는 두 단어의 연결을 기어코 선보인다. 칼레드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폭격이 누구의 짓인지 모른다. 시리아군인지 반군인지, ISIS인지 미국인지러시아인지 그는 모른다. 단지 자신과 여동생을 제외한 가족들이 점심식사 중에 모두 폭사했고, 핀란드는 자신의 망명 신청을 기각했다. 그의 망명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던 공무원은 친절하게 그의 상황을 듣고, 상황의 절박함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그는 결국 핀란드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진다. 시리아, ISIS, 미국, 핀란드 등 국가단위(혹은 그에 맞는 사이즈)의 거대한 집단 사이에서 칼레드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호소에서 만난 다른 망명자 친구와 비크스트롬, ‘황금 맥주잔’의 종업원들뿐이다. 보호소에서 만난 친구와는 담배를 나눠 피며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여동생을 찾는 칼레드를 위해 모든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며 형제애를 다진다. 동병상련의 상황에 놓인 두 인물의 서로 의지하는 상황은 어찌 보면 평범한 전개처럼 보인다. 주목할만한 것은 비크스트롬과 식당의 종업원들이 칼레드를 대하는 모습들이다. 그들이 칼레드를 대하는 모습은 갈 곳 없는 난민에게 시혜적으로 손길을 내미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동료애가 넘치는 따뜻함으로 가득한 모습도 아니다. 비크스트롬이 칼레드를 고용하는 것은 식당에 직원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임금이 체불된 다른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가불해 주었으며, 칼레드의 노동력이 필요하기에 그를 도와준다. 일종의 ‘사원복지’ 차원으로 느껴진달까. 영화가 그려내는 비크스트롬의 모습은 이제 막 식당을 인수하여 직원들의 충성을 얻고 신뢰감을 쌓으려는 사장의 모습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칼레드의 여동생이 핀란드에 도착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꽤나일상적인 모습들이다. 때문에 <희망의 건너편>이 그려내는 따뜻함은 아가페적인 온정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연대와는 성격이 다르다. 비크스트롬과 칼레드는 각자 필요한 것을 서로에게 요구했고, 그들의 니즈는 서로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형태의 것이었다. 때문에 비크스트롬은 칼레드를 고용하고, 칼레드는 그를 위해 노동한다. 

 <희망의 건너편>의 원제 ‘Toivon tuolla puolen’을 구글 번역기에서 ‘나는 그 이상으로 희망한다’로 번역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희망하는 그 이상은 무엇일까? 그가 지금의 상태에서 희망하는 것과 그 건너편에 존재하는 희망은 무엇일까? 최근 유럽에서 쏟아지고 있는 난민 소재의 극영화들과 중동 현지에서 제작되는 다큐멘터리들은 현재의 상황을 보도하듯 난민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옮기고 있다. 국가단위의 폭력 사이에서 거처를 잃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도는 모습을 리얼하게,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적일지라도 스크린에 그려지는 삶만큼은 리얼리즘에 가깝게 옮겨진다. <희망의 건너편>은 이러한 현실 사이에서 뜬구름 잡는 듯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낙관적인 해피엔딩을 꿈꾸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코미디의 톤을 띈 (중반부에 등장하는 스시 시퀀스는 올해 최고의 코미디였다) 영화는 칼레드의 해피엔딩을 낙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그렇지 않다. 마침내 여동생과 재회한 칼레드는 망명 신청을 위해 경찰서로 들어가는 여동생과 인사를 한 뒤 네오나치의 칼에 찔린 배를 움켜쥐고 어느 호숫가의 나무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쉰다. 그럼에도 칼레드는 웃는다. 비크스트롬과 식당의 사람들을 만났고, 보호소에서 만난 사람과 형제가 되었고, 잃어버렸던 여동생은 핀란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말하는 희망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낙관적인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계속 살아가길 꿈꾼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이 꿈꾸었던 희망이 상황의 종료였다면, 카우리스마키는 그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길 희망한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리적인 따뜻함을, 합리적인 연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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