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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8. 2017

고발을 위해 착취를 전시하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물속에서 숨 쉬는 법>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두 가족의 하루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자동차 부품 공장의 인사관리팀장 준석(오동민)은 생산라인의 노동자에게 사직을 권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괴로워한다. 준석의 아내 은혜(이상희)는정신질환 약을 먹을 정도로 육아에 시달리고 있고, 은행에 다녀오라는 준석의 닦달에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은행으로 향한다. 은행 앞에 세워둔 차에 아기를 두고 잠시 은행에 다녀오는 사이 차가 견인 당하자 은혜는 망연자실한다. 다른 가족은 준석과 같은 공장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반장 현태(장준휘)는 부하직원을 권고사직시키라는 지시에 괴로워한다. 현태의 아내(조시내)는아들(김현빈)을 데리고 병원을 찾고, 아들이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내는 다친 팔목의 깁스를 풀고,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로 일터로 향한다. 아들은 난독증임에도 국어시간에 낭독해야 할 시를 계속 들여다본다. 영화는 두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가며 대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로카메라를 향한다. 두 가족,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들의 힘겨운 삶은 말 그대로 물속에서 질식해가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영화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제시한다. 그들의 삶이 가진 시간차는 준석과 은혜의, 현태와 아내의 전화통화를 통해 좁혀진다. 96분의 러닝타임은 같은 시간을 각 인물의 시각에서 다시 보여주고, 각각의 시간을 모두의 하루로 봉합해가며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영화는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해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익히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단일한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다섯 명의 인물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방식은 그들 각자의 생존법을 보여주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몰아가는 사회적인 혹은 가족 사이의 사건들을 전시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술에 취해 추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괴로워하던 현태가 객사한 채로 발견되고, 은혜가 자동차에 두고 내린 아기 역시 응급실에 도착하지만 사망한다. 영화는 다섯 인물 각각의 삶과 고난을 전시하고, 그중 몇몇을 택해 그들이 죽은 모습을 담아낸다. 결국 소시민들에게 물속에서 숨 쉬는 법 따위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이러한 소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고발하기 위해 각 인물들의 불행을 전시하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전화통화로만 이어지는 준석과 은혜, 현태와 아내의 소통은 좁혀지는 시간차처럼 무언가 거리를 좁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각자의 고통과 비극으로 이어진다. 고현석 감독은 이러한 편집을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다섯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제각각 보여준다는 의미 외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인 현태에겐 클로즈업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 바스트 숏 이상의 클로즈업이 들어간 장면은 뮤직 펍에서 신청곡도 가능하냐고 묻는 장면 딱 하나뿐이다. 다른 인물들에겐 골고루 클로즈업이 들어갔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촬영은 관객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의 모습은 완전히 타자화된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은혜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가 약을 먹는 장면은 제시되지만 극 중 그것이 산후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준석의 윽박지름과 은혜가 저지르는 몇몇 사고만이 등장할 뿐이다. 결국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없이 그들의 고통만 전시하는 영화는, 그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와 짜증만을 남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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