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6. 2017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진짜 보수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카운터스>

 전직 야쿠자인 다카하시는 혐오와 싸운다. 수금이나 포주 일을 하던 야쿠자가 혐오와 싸운다는 게 굉장한 넌센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이다. 타카하시는 아쿠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뒤 도쿄 코리안타운에서 벌어지는 혐오데모를 목격한다. 사쿠라이가 이끄는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이른바 재특회가 주도하는 혐오데모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혐오데모를 반대하는 사람들, ‘카운터스’의 활동을 함께 목격한다. 재특회가 벌이는 혐오와 차별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다카하시는 카운터스의 활동을 보고 ‘오토코구미’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오토코구미는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전직 야쿠자, 사진기사, 기업인, 변호사, 가수, 저널리스트 등이 모인 초압력 비폭력 단체이다. 그들은 혐오데모를 하는 사람들에게 폭압적인 언행을 하며 그들을 몰아붙이지만, 그들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시위대를 가로막거나, 주동자에게 몸을 날리거나, 혐오데모 시위대가 행진할 거리에 누워 도로를 점거한다. 또한 오토코구미의 누군가는 머리가 되어 작전을 짜고, 헤이트 스피치 금지 법안을 발의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우경화되어가는 일본 사회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보수라고 말하는 사쿠라이를 비롯한 넷-우익들이 혐오데모를 일삼는 가운데, 다카하시는 자신이 진정한 보수이자 우익이라며 혐오주의자, 차별주의자들을 상대한다.

 이일하 감독의 <카운터스>는 다카하시의 오토코구미, 그리고 혐오데모의 맞서는 카운터스의 활동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다카하시가 혐오데모 대열에 돌진하여 체포된 뒤 본격적으로 오토코구미를 결성하고 카운터스 운동에 뛰어들게 된 날부터 헤이트 스피치 금지 법안이 통과된 날까지의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한다.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우익이라 부르는 전직 야쿠자가 혐오데모에 맞서는 조직을 만들고 인종차별과 더 나아가 성소수자 운동과도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일본의 우익이나 야쿠자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식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다카하시는 극도로 마초적인 사람이다. 욕설과 야쿠자 특유의 말투로 가득한 그의 언행, 웃통을 벗고 양팔과 가슴을 가득 채운 문신을 드러내며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스스로를 마초라 칭하는 모습까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마초’라는 모습에 정확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동시에 극도로 마초적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정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와카운터스가 일궈낸 성과는 정의에 한없이 가깝다고 볼 수 있다)되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거나 타카하시는 우익이다. 그는 일본인이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고, 소위 일본적 가치라고 불리는 것을 신봉한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혐오주의자와 차별주의자들에 반대하고 그들을 혐오한다. 사쿠라이와 재특회를 비롯한 넷-우익들이 벌이는 혐오와 차별이 녹아든 내셔널리즘은 타카하시가 말하는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는 다르다. 타카하시가 믿는 보수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명확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그와 함께 활동하는 대부분의 카운터스는 좌익, 좌파를 자칭한다. 그들과 타카하시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일본의 역사에 대한 관점, 외교나 원전 문제와 같은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타카하시와 그의 동료들은 입장이 다르다. 동시에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 타카하시의 말처럼, 그것은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헤이트 스피치 금지 법안까지 이끌어낸 타카하시의 행동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러나 그와 카운터스가 꿈꾸는 세상은 우익과 좌익 사이에 던져질 정치적 논제로써 혐오와 차별이 등장하지 않는 세상인 것만 같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에 타카하시는 카운터스와 함께하고, 혐한시위/혐중시위에 반대하고, 성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한다. 인권을 놓고 말장난만 반복하는 정치 싸움 사이에 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쾌감이, 감동이 생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 강제된 선택의 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