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한국영화는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웠다. <더 킹>과 <공조>로 시작해서 <강철비>, <신과 함께: 죄와 벌>, <1987>로 끝나는 소위 4대 배급사들의 텐트풀 영화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단점이 더욱 부각되는 작품들이었다. 동시대에 이런 괴작을 만날 수 있다는 영광을 안겨준 <리얼>도 있었고, <신세계> 이후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느와르의 홍수 속에서 여성 주연을 내세운 <악녀>와 <미옥> 같은 작품도 등장했지만 처참한 완성도와 함께 흥행에 실패했다. 도리어 <청년경찰>과 <범죄도시> 같은, 여성혐오와 조선족혐오의 정서가 담긴 작품이 깜짝 흥행을 기록한 한 해였다. 천만을 달성한 <택시운전사> 정도를 제외하면 많은 상업영화들이 흥행의 측면에서 죽을 쑤던 한 해였고, 영화들에 대한 평가 역시 아쉽기 그지없는 한 해였다. <옥자>가 불러온 넷플릭스의 관한 이슈와 영화계 내 여성들에 대한 논의들이 올해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도리어 독립영화 쪽에서는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작년 영화제들을 통해 처음 소개된 <꿈의 제인>이나 <재꽃>이 좋은 평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작년에 관람했기에 올해의 리스트에서는 제외했다), <분장>, <폭력의 씨앗> 등의 작품들이 그 뒤를 이었다.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버블 패밀리>나 <옵티그래프>와 같은 다큐멘터리들이 극장을 차지했던 많은 상업영화들 보다 더욱 주목받았어야 할 한 해였다. 아직 관람하지 못한 <초행>,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 등의 영화들이 있지만, 남은 2017년 안에는 관람이 어려울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연말을 맞아 올해 극장과 영화제를 통해 관람한 한국영화 중 가장 좋았던 영화 다섯 편을 골라보았다.
Best 5. <개의 역사> 2017
감독: 김보람
출연: 김보람
올 한 해 국내 영화제들 속 주목받은 영화들은 극영화들이 아닌 다큐멘터리였다.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2017), 강유가람의 <시국 페미>(2017), 이원우의 <옵티그래프>(2017), 김동원의 <내 친구 정일우>(2017) 등의 영화들이 서울, 전주, 부산, DMZ 등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대부분의 작품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지 못했지만, 그중 <개의 역사>는 꼭 다시 한번 스크린에서 만나보고 싶은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된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두 가지 흐름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노무현입니다>(2017)나 <미스 프레지던트>(2017)처럼 최근의 정치상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영화들이 한 축이라면, <버블 패밀리>나 <옵티그래프>처럼 사적인 이야기를 엮어 일상에서 사회 전반으로 문제의식을 확대시켜나가는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또 다른 한 축이 된다. <개의 역사>는 두 번째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김보람 감독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있는 어느 이름 없는 백구의 역사를 궁금해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백구의 이야기를 아는지 물어보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거의 돌아오지 않고, 몇몇의 작은 파편들만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감독은 이사를 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알게 된 이웃, 정자의 할머니들, 길을 떠도는 개와 비둘기, 덩그러니 놓인 육교 등의 역사를 알고 싶어 한다. 감독은 결국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실패는 타인이 절대 또 다른 타인의 역사를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알아낼 수 없는 작고 미시적인 역사들이 엮여 동네를 이루고 도시를 이루고 사회를 이룬다. 작은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이사라는 사건을 통해 발상을 확대시키고, 그 형식을 온전한 장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냈다는 점이 <개의 역사>의 성취가 아닐까 싶다.
Best 4.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
감독: 현성현
출연: 설경구, 임시완, 김희원, 전혜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브로맨스로 점철된 한국 느와르 영화(라고 쓰고 알탕영화라 읽는)들의 어떤 특이점과도 같다. <불한당>은 퀴어 느와르다. 사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나이 든 조폭과 어린 잠입 경찰의 브로맨스가 퀴어베이팅의 형태로 드러나는, 익숙한 이야기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들, 가령 <불한당>을 본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이나 처음부터 한재호(설경구)의 캐릭터를 바이섹슈얼로 설정했다는 인터뷰, 그렇게 이해하고 연기했다는 설경구와 김희원의 이야기 등을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작년 컬트적인 인기를 모은 <아수라>가 등장인물 모두를 악인으로 설정한 뒤 파국을 빚어내며 포화상태에 이른 한국 느와르 영화의 극단을 보여줬다면, <불한당>은 브로맨스라는 키워드를 일종의 극단으로 가져가 아예 퀴어 멜로드라마로 재해석해버린 작품이다. 한재호와 조현수(임시완)가 벌이는 섹스신에 가까운 주먹다짐이나 (이 장면의 촬영은 명백히 액션 시퀀스라기보단 멜로드라마 속 섹스신에 가깝다), 고병갑(김희원)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짝사랑에 가까운 행동까지 영화의 많은 부분이 멜로드라마적 설정과 장면들로 가득하다. 서사의 당위성은 애정이라는 키워드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다. 여기에 변성현 감독은 연출자로서 자신의 기량을 한껏 선보인다. <불한당>은 <해빙>, <싱글라이더>와 함께 올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 가장 영화적인 만듦새를 갖춘 작품이다.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며 감정선을 쌓아가는 편집, (액션 시퀀스는 어딘가 아쉬웠지만) 두 주인공이 공유하는 애정과 장르적 공식에 충실한 촬영, <더 킹>의 한소진 검사와 함께 기억할만한 느와르 장르 속 여성 캐릭터인 천인숙(전혜진) 등의 요소들은 생각할수록 <불한당>을 더욱 긍정하게 만든다. 물론 천인숙 이외의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 등 한계점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지만, <아수라>와 함께 과포화 상태인 한국 느와르 장르의 일시적인 마침표를 찍기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Best 3.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2017
감독: 정윤철
출연: 밤섬해적단, 단편선, 박정근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인디밴드를 기록한 영화들은 그들의 음악과 행보를 담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이라는 지역성과 이 곳의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리반을 시작으로 주민잔치, 대학 축제, 집회 시위 현장, 길거리까지 나서게 된 인디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담은 <파티 51>(2013), 군대, 취업, 가족, 생활 등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들이 공유하는 주제들을 녹여낸 <노후 대책 없다>(2016) 등의 다큐멘터리들이 관객들을 만났다. <논픽션 다이어리>(2013) 등을 연출한 정윤석 감독의 신작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역시 이러한 흐름 안에 존재한다. 120분의 러닝타임은 '밤섬해적단'이라는 1부와 '서울불바다'라는 2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따로 파트가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영화는 러닝타임을 거의 절반으로 나누어 밤섬해적단의 음악과 행보를 설명하고, 그들의 친구이자 프로듀서인 박정근의 '리트윗 국가보안법' 사건을 이야기한다. 앞선 한 시간에는 서울대 점거농성, 두리반, 제주 강정기지 시위 등의 현장을 오가고 음반을 녹음하는 밤섬해적단의 음악과 행보가 담긴다. 밤섬해적단은 북한을 비롯해 한국이라는 지역만이 지닌 온갖 논란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이러한 그들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관객들에게 설명한 뒤, 박정근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건으로 넘어간다. 그다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극소수의 인디뮤직 매니아 정도만이 존재를 알고 있던 그들이 북한을 조롱했다는 것만으로 구속되고 압수수색을 받는 과정이 그려진다. 오랜 세월 곪아왔던 한국의 레드 컴플렉스는 그들에게 여러 장난감 중 하나였지만, 국가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장난감을 불건전한 것으로 취급한다. 때문에 그들의 세계관을 보여준 뒤 해당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비교적 차분하게 풀어가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형식은, 한국의 오래된 레드 컴플렉스에 대한 정면돌파이자 그것에 중지를 치켜드는 새로운 조롱이다.
Best 2. <여배우는 오늘도> 2017
감독: 문소리
출연: 문소리, 전여빈
2016년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SNS를 통해 시작되었고, 당연하게도 영화계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페미니스트 영화인 그룹인 찍는페미가 개설되고, 서울독립영화제 등의 영화제에서는 영화계 내 성평등을 논하는 포럼이 열렸다. <비밀은 없다>(2016), <아가씨>(2016)를비롯해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들이 다른 해에 비해 비교적 많은 성과를 보여주었던 작년이 지나고 2017년이 찾아왔다. 정작 2017년의 한국 상업영화판은 전진보단 후퇴에 가까웠다. 올 한 해 흥행한 한국영화 상위 20편(2017.12.26 기준)의 메인 포스터 속 여성은 6명(<군함도> 이정현, 김수안, <신과 함께: 죄와 벌> 김향기, <꾼> 나나,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조작된 도시> 심은경)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소리는 직접 연출, 각본, 주연을 맡은 작품 <여배우는 오늘도>를 내놓았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대학원을 다니며 연출한 세 편의 단편영화(<여배우>, <여배우는 오늘도>, <최고의 감독>)을 한 편의 영화로 묶은 옴니버스 영화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한국에서 여배우로, 여성으로, 어머니로, 딸로, 영화인으로 살아가는 문소리의 모습을 녹여낸다. 영화 제작자와의 우연한 만남과 이어진 술자리의 에피소드, 개인이자 어머니이자 딸인 여배우 문소리의 하루, 영화인으로서의 생각들을 담아낸 에피소드 등이 순서대로 펼쳐지며 '한국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여배우/여성의 삶'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최고의 연기자일 뿐만 아니라 연출자로서도 좋은 기량을 선보이는 문소리의 <여배우는 오늘도>는 여배우를 비롯해 여성 감독, 여성 스탭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영화계의 지금을 그 무엇보다 적나라하고 세련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의 개봉과 함께 전도연, 김태리, 라미란, 류현경 등 많은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한 릴레이 GV가 영화에는 담기지 않은 4부라는 농담 아닌 농담은 <여배우는 오늘도>가 남기는 소중한 기록이자 성과다.
Best 1.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 & <그후> 2017
감독: 홍상수
출연: 김민희, 권해효, 정재영, 서영화, 송선미(밤의 해변에서 혼자)/김민희, 권해효, 김새벽, 죠윤희(그후)
다섯 편만 고른다 했지만 결국 6편의 영화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홍상수의 19번째, 21번째 장편영화(20번째인 <클레어의 카메라>는 대체 언제 개봉하는 것인지)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그후>는 다소 암담했던 2017년 한국영화들 사이에서 여전히 건재한 홍상수의 저력을 보여준다. 혹자는 언제나 똑같은 홍상수의 이야기가 또다시 반복되기만 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특히 김민희와 함께한 첫 작품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부터 <그후>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의 최근작에서 점점 솔직해지는 홍상수와, 영화의 중심인물이 정재영, 이선균, 김태우 등으로 대표되는 '홍상수의 찌질한 남자들'에서 김민희라는 축으로 옮겨가고 있음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성찰적 고백과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속 당신은 당신 그 자신이기에 기꺼이 존대하겠다는 선언은 앞선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보지 못했던 성격의 이야기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더더욱 솔직한 홍상수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앞서 성찰과 존대를 말했던 홍상수는 김민희를 새로운 페르소나, 아니 페르소나이자 자신과 어떤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상정하고 지금까지의 그를 대변해왔던 찌질한 남자들(정재영, 권해효, 문성근 등)을 찍어 누르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후>는 가히 홍상수의 케이퍼 무비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간 여러 시간대를 중첩시키기도 하고, 평행우주처럼 같은 시간을 반복하기도 했으며, 찢어진 편지 조각을 무작위로 주워 만든 것처럼 시간대를 변형하기도 했다. <그후>는 이러한 형식 중 가장 평범한 기법으로만 가득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간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플래시백이 <그후>에서는 적극적으로 활용되며, 케이퍼 무비의 느낌이 나는 작당모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간결해진 형식 속에서 홍상수가 던지는 질문은 더욱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왜 사세요?" 김민희의 입에서 던져지는 이 질문은 살아있기에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들린다. 결국 홍상수는 시간과 공간, 인간을 말하고 그것들의 집합인 영화를 실험한다. 아직 개봉하지 못한 <클레어의 카메라>와 현재 제작 중인 <풀잎들>이 기대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