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홍기선 1992
한국영화 독립영화계의 시초 중 하나로 여겨지는 고(故)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여러모로 장준환 감독의 신작 <1987>을 연상시킨다.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이한열 최루탄 피격으로 이어지는 1987년 6월 항쟁의 시간선을 두 영화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1987>이 직접적으로 해당 사건을 묘사한다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우회적으로 6월항쟁을 묘사한다. 영화는 전국을 떠돌며 일자리를 구하던 방랑자 김재호(조재현)를 따라간다. 조재현은 어느 소개소를 추천받아 가지만, 그가 얻은 것은 빋과 현대판 노예선이라고 불리는 '멍텅구리' 새우잡이 배의 일자리뿐이다. 영화는 재호가 타게 된 새우잡이 배의 라디오를 통해 동시대의 사건들을 전달한다. 박종철이 고문 중에 사망했다는 보도부터 이한열 최루탄 피격과 그에 따른 대규모 시위, 이어지는 6.29 선언과 노태우가 차기 정권을 잡게 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전달된다. 처음 배에 올라탄 재호는 폭력적이며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배의 만행에 불만을 토하지만, 사공(이요삼)에게 구타를 당하며 배의 규칙에 순응하게 된다. 사공이 은퇴하자 재호가 사공이 되고, 권력을 쥔 그는 이전의 사공처러 배를 지배하려 하지만 자신의 탈출계획을 밀고했던 선원들과 함께 선주의 배를 빼앗아 뭍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결국 몰아치는 여름의 태풍으로 인해 그들은 모두 사망하고, 새우잡이 배의 소년(장민성)만이 바다 위에 표류하며 생존한다. 결국 홍기선의 작품은 독재와 권력을 쥔 자의 횡포를 고발하고, 돈에 의해 발이 묶인 사람들이 결국 물리적인 힘과 연대로 혁명을 시도한다는 서사를 지닌 작품이다. 때문에 홍기선과 장준환의 두 작품은 같은 시간대뿐만 아니라 유사한 서사를 공유한다. (선원 중 하나인 정복춘(최동준)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라디오 보도를 들으며 "민주화 따위~"라고 말하지만 결국 탈출을 갈구하고, 재호의 계획에 들떠서 참여한다. 이러한 지점은 6월항쟁 당시의 운동권 밖 사람들이 항쟁에 동참하게 된 각성의 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1987>의 연희(김태리) 캐릭터와 유사한 지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결말부에 다다르면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택하게 된다. <1987>은 완전한 승리의 서사다. 6월항쟁 이후에도 크게 변화한 것이 없는 노동자 계층은 1987년 7월~8월 동안의 노동자 대투쟁을 선택한다. 또한 6월항쟁 이후 정권을 잡은 집단이 기존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군부 출신의 노태우라는 점에서 6월항쟁은 미완의 승리다. 그러나 마치 <레미제라블>과도 같은 뮤지컬처럼 연출된 <1987>의 마지막 시퀀스는 6월항쟁을 완전한 승리의 서사로 묘사한다. 이것은 촛불혁명으로 인한 승리의 경험을 고취시키는, 지극히 프로파간다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혁명의 전조를 드러내지만 이는 태풍에 의해 무산되고, 살아남은 소년은 희망적인 일출을 바라보지만 그 끝에 소년이 당도할 수 있는 섬이나 육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홍기선의 영화는 미완의 승리 혹은 6월항쟁이라는 혁명의 역사 속에서도 승리를 얻어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서사이다. 이는 아마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휩쓸고 가고 정권교체에 성공한 승리의 경험을 공유하는 2017년의 영화와 아직 군부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1992년의 영화가 지닌 차이점일 수도 있다. 동시에 서울 혹은 도시권의 학생 운동권이 주도하다시피 한 혁명과 도시도 되지 못한 지방의 노동자가 시도한 혁명이 지닌 차이점을 그 무엇보다 서늘하게 드러내는 격차로도 느껴진다. 다만 여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유사하면서도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가슴을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모든 캐릭터는 매춘부이며, 시장과 터미널 등에서 스쳐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프레임 속에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 여성들은 홍등가 혹은 섬의 술집에 묶여있다. 반면 <1987>에서는 연희라는 유일한 가상의 캐릭터가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혁명에 동참하고, 어떤 캐릭터로써 등장하지는 않지만 운동권 동아리의 회장이 여성이라던가, 데모 장면에서 보이는 여성 엑스트라의 숫자 등 1992년의 작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혁명을 일으킨 주체로서 여성을 등장시킨다기 보단 위로나 보조, 혹은 각성하는 캐릭터로서만 여성을 등장시킨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