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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6. 2018

너무나도 촌스러운 그녀의 이름에 대해

심혜경의 불온한 스크린 관찰기 - 용순이와 미자 그리고 숙희와 미옥이

 최근 듣고 있는 강의-심혜경의 불온한 스크린 관찰기-를 듣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제의 수업이다. 어제 강의의 제목은 “너무나도 촌스러운 그녀의 이름에 대해: 용순이와 미자 그리고 숙희와 미옥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용순>, <옥자>, <악녀> <미옥> 등 2017년에 개봉한, 그리고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들을 다루고 있다. 강의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네 편의 영화는 60~80년대에 주로 사용되던 여성화된 촌스러운 이름들을 주인공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우는데, 여성중심적인 영화를 표방한 이들 영화들은 왜 2017년에 다시 이러한 이름들을 소환하는 것일까? 각 영화들의 시대가 <아가씨>처럼 과거의 시점인 것도 아니다. 네 편의 영화는 인물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명백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강의는 2005년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강력한 모성의 힘으로 복수에 성공한 뒤, 이러한 촌스러운 이름의 여성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고, 여러 액션을 벌이는 등 자신들의 육체성을 영화 전반에 걸쳐 이용하며, 동시에 성(姓)이 없고 애인/어머니/딸 등의 관계로써 호명된다. 

 이름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지표이기도 하고, 성과 관련된 부분은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써의 개인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결국 ‘이름을 가진다’라는 행위는 개인이 자아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받은 것이든 스스로 지은 것이든)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존재성 자체의 문제와 직결된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이름이 어떻게 작명되었는지를 우선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까지 여성의 이름에는 성이 포함되지 않았다(혹은 포함되었더라도 제대로 불리지 않았다). 여성은 가문의 대를 잇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재생산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며느리로서 다른 가문에 보내지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될 교환물에 지나지 않았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은 가문을 잇는 것과는 상관없는, 그렇기에 양반이 아닌 상놈들처럼 성이 필요 없는 존재였을 뿐이다. 역사 속에 기록된 여러 여성들의 이름이 혜경궁 홍씨라던가 폐비 윤씨처럼 남편/아버지의 성으로만 기록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설명된다. 1909년 민적법이 실시되면서 신분과 성별의 구분 없이 성과 이름이 생기게 되고, 식민지 시대의 창씨개명과 호적법을 거치며 70년대까지 주로 등장하던 여성화된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령 자(子), 숙(淑), 옥(玉), 순(順), 희(姬) 등 아들을 염원하거나 여성이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한자들이 들어간 이름이 곧 여성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80년대 들어 이름이 현대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는 줄어들게 된다.


 공교롭게도 강의에서 다루는 네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앞서 언급한 다섯 한자가 골고루 섞여 들어간 이름들이다. 동시에 그들의 성 또한 언급되지 않는다.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이 이름들은 주인공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제목이라는 지위를 꿰차고 있다. 보통 주인공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인 경우, 대부분 위인 혹은 영웅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디아나 존스>, <빌리 엘리어트>, <슈퍼스타 감사용> 등의 수많은 예시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촌스러운 여성형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네 영화들의 여성 재현은 어떠한가? 강의는 <용순>과 <옥자>, <악녀>와 <미옥>을 각각 묶어서 설명한다. 

 <용순>의 용순(이수경)의 이름의 유래는 “용 ‘용’에순할 ‘순’, 엄마가 용순을 낳을 때 용썼다고 해서 용순’이라고 설명된다. 영화는 출산의 과정을 이름으로 삼은 한 청소녀가 계속하여 달리면서 여러 고민들을 드러내고 결말을 맺는 과정을 담아낸다. <용순>의 용순은 거침없다. 체육선생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친구들과 저돌적인 전략들을 펼치고,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그들에게 저항 또는 상대한다. 그러나 영화는 용순의 저돌적인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사춘기 시절의 철없음, 혹은 어느 시골 풍경 속의 아련한 그 시절 정도의 수준으로 묘사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봉합, 어른인 새엄마의 개입과 영화 내내 부재하던 아버지와의 화해라는 방식은 용순의 철없음 혹은 사춘기 시절이라는 한 때로 용순의 행동을 정의 내리며 그녀의 적극성을 희석시킨다. 결국 용순은 ‘순’이라는 이름 그대로 순응하는 순한 여성이 되어 영화가 마무리되고 만다. 시골 학교에 다니는 사춘기 소녀의 이름이 용순이라니, 작명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감성과 어떤 향수가 바로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가 싶은 수준이다.

 <옥자>의 미자(안서현)는결국 옥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거대 기업인 미란도를 상대로 말이다. 강의에서는 이러한 미자가 아직 여성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아직 톰보이적인 면모를 보이는 아동기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용순이 청소녀로써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캐릭터였다면, 미자는 캐릭터가 품고 있는 남성성(액션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캐릭터이다. 동시에 미자와 옥자의 관계는 여성연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서로가 엄마이자 딸리고 친구이자 연인인 일종의 대안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미자와 옥자라는 이름과 둘의 관계, 최종적으로 미자가 옥자를 구출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결말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한국의 여성들이 부여받은 이름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을 통한 신식민시대의 기업과 어른들과 싸워 이긴다는 서사가 <옥자>의 서사이다. 미자와 옥자라는 여성형 이름은 겉으로는 구별되기 어려운 둘의 성별을 여성으로 상정하면서 둘의승리가 지닌 순수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욕망을 여성(루시&낸시 미란도 - 틸다 스윈튼)으로 표현한 것, 서구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오리엔탈리즘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구도, 어떠한 문제제기나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까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용순>과 <옥자>는농촌 소녀들의 촌스러운 이름을 통해 (아마도 연출자인 남성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노스탤지어를 드러내고, 다가온 테크놀로지 시대에 대한 해결책은 여성의 순수성과 촌스러운 이름에서 드러나는 과거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악녀>와 <미옥>의 테마는 상당히 유사하다. <악녀>의 숙희(김옥빈)는 조선족 출신의 킬러로 중상(신하균)에게 버림받고 한국 국정원의 암살요원으로 일하며 중상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키우다가, 딸과 사랑하는 남자 현수(성준)를 모두 잃게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옥>은 조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키운 나현정(김혜수)이 은퇴를 원하면서 상훈(이선균)과 최 검사(이희준), 보스인 김 회장(최무성) 등과 얽힌 관계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내용을 그린다. 당연하게도 현정에겐 김 회장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숙희와 미옥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성을 동력으로 삼는 복수심이다. 숙희는 딸을 잃고, 미옥은 아들과의 삶을 꿈꾼다. 두 캐릭터 모두 자식에 대한 모성애, 연애대상(?)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 아늑한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제공되는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 등을 보여준다. 극대화된 육체적 능력을 지닌 이 캐릭터들이 기어이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모성과 이성애적 사랑으로 봉합되는 가부장제적 정상가족이다. ‘여성 중심 액션 영화’를 표방하고 그렇게 마케팅을 해온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사랑과 모성 없이는 전혀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모양새다. <악녀>는 <영자의 전성시대>나 <별들의 고향>과 같은 전근대적 여성 잔혹사의 연장선이고, <미옥>은 오롯이 남성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으로서 현정을 그려낸다. 특히 <미옥>은 여성에 대핸 성적 대상화와 모성이라는 테마, 액션 누아르라는 장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성녀/창녀의 단순 이분법 속에서마저 길을 잃은 채 내러티브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두 영화 모두 강인하고 육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설정해 놓고 모성을 강제적으로 주입하여 탄생한 괴작이다.

 물론 두 영화는 백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이다. <악녀>에는 숙희의 상사 권숙(김서형)이 등장하고, <미옥>에는 현정의 밑에서 일하는 웨이(오하늬)가 등장한다. 하지만각각의 캐릭터 역시 모성과 가부장제적인 이성애 시스템이라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 그 밖으로 주인공을 탈출시킬 수 있는 서사를 보여주진 못한다. 결국 두 영화는 남성화된 상업영화계가 지닌 상상력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과거 할리우드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이리언> 시리즈의 리플리(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 2>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등의 캐릭터가 존재한다. 두 캐릭터 모두 여성이지만, 남성성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액션들을 선보이며 총으로 침략자(외계인, 로봇)를 처치한다. 동시에 두 캐릭터에게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는 <악녀>나 <미옥>이 지닌 한계점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두 캐릭터 모두 모성과 이성애적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캐릭터이며, 한국의 두 영화보다 성공한 이유는 더욱 촘촘한 내러티브와 이를 구현하는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 액션 영웅이라는 존재는 그간 남성성으로 대표되어 온 육체적인 액션을 선보이는 캐릭터이지만, 그들이 강인함이라는 남성성을 지니게 될 경우 모성과 이성애라는 한계를 반드시 두게 된다. 결국 그들이 어떤 개인 주체로서 가지게 되는 욕망, (모성 같은 것을 제외한) 여성성 혹은 여성적인 욕망은 그들이 남성성(액션)을 획득함으로써 거세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성과 (남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이성애를 전면화함으로써만 그들이 지닌 남성성을 전면화하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또한 숙희와 현정은 리플리나 사라 코너에 비해 섹스어필이 상당히 강조된다. 80년대 하드 보디 액션 영화의 광풍이 휩쓸고 난 뒤인 90년대 <니키타>나 <지. 아이. 제인> 등의 여성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여성 액션 영웅들은 ‘남성 되기’와‘섹스어필’의 두 가지 전략을 병행하게 된다. 리플리와 사라 코너가 아이코닉한 이유는 이러한 전략에서 섹스어필을 배제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숙희와 현정이 보여주는 남성 되기와 섹스어필의 투 트랙 전략은 기본의 남성/여성의 젠더 역할만을 공고히 할 뿐, 진정한 여성 액션 영웅이 등장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만이 이러한 구도 사이에서 여성연대를 이끈 강력한 여성 영웅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강의에서 언급한 것은 퓨리오사까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원더우먼>의 원더우먼을 살짝 끼얹어 보고 싶다. 물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캐릭터가 전개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악녀>와 <미옥>은 충무로가 여성 영웅을 원하는 여성 관객들의 욕구와 페미니즘의 조류의 편승하고자 하는 제작사들의 욕망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낸 신호 이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악녀>와 <미옥>의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숙희와 현정은 극 중 이름이 두 가지라는 점이다. 숙희는 국정원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채연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나현정은 미옥이라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과거의 상처 속에 묻어둔다.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을 지닌 개인을 비롯해 가족, 사회, 지역 등의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다른 정체성, 관계 등을 재정의한다는 의미이다. 숙희는 채연수라는 이름을 통해 가부장제적 국가 시스템(국정원) 안으로 편입되었고, 미옥은 나현정이라는 이름을 통해 남성화된 조직에 편입된다. 숙희와 미옥이라는 기존의 이름은 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두 인물은 가부장제에서 배제된 주변인으로써의 호모 사케르로 존재했다. 마치 조선시대의 여성들처럼 말이다. 성이 포함된 새로운 이름을 얻은 채연수와 나현정은 국가기관과 유사기업이라는 남성적인 가족의 이름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이름에는 숙희와 미옥이라는 자기동일성을 가질 수 있는 기존의 이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파국을 맞이하는 두 이름은, 게다가 숙희와 미옥이라는 촌스럽고 전근대적인 이름이 아닌 현대적이며 덜 여성적인 이름은 실패한 이름/캐릭터가 된다. 두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이름은 모성/이성애라는 가부장제적 장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적 욕망을 위해 행동할 수 없도록 서사를 구조화하는 상상력의 집단적 태만이다. 


 결과적으로 <용순>, <옥자>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 노스탤지어와 <악녀>, <미옥>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모성, 이성애라는 한계는 공교롭게도 네 작품의 연출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팩트와 연결된다. 각 남성 감독이 스스로 각본을 쓴 네 개의 작품은 그들이 지닌 상상력의 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은 한계가 절실히 드러나는 지점이랄까? 여성적 욕망은 무엇일까? 남성성의 대척점으로서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성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을 탐구하고 상상하지 않는 지금의 태만이 시대착오적인 이름들을 스크린 위로 소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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