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2. 2018

결국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반동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스포일러 포함 


 <킬러들의 도시>, <세븐 사이코패스>로 국내에 알려진 마틴 맥도나의 신작 <쓰리 빌보드>가 개봉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모로 화제를 끌어 모았기에 개봉을 기다리던 작품이었다. 여러모로 화제를 끌어모은 것과는 반대로 영화의 시놉시스는 어딘가 전형적인 느낌이 든다. 미주리주 에빙이라는 마을에 사는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딸이 강간 살해당한 지 7개월이 지나도록 경찰의 수사가 진전을 보이지 않자, 마을 외곽에 있는 낡은 광고판에 광고를 게시한다. “강간당하면서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윌러비 서장은 무얼 하고 있나?” 윌러비 서장(우디 헤럴슨)과 딕슨(샘 록웰)을 비롯한 경찰들을 향해 광고를 게시한 밀드레드의 이야기는 언뜻 익숙한 복수극 서사에 속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정보만 접했을 때는 세 개의 광고판으로 촉발된 사건이 범인을 찾는 것으로 연결되고 밀드레드의 사적복수 혹은 결국엔 움직이고야 마는 공권력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지는 익숙한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는 이러한 기대를 뒤집어엎는다. 

 <쓰리 빌보드>는 복수극 서사의 전형성을 빗겨나간다. 밀드레드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 사적복수를 실현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과 어빙이라는 마을 공동체가 움직이기를 걸쭉한 육두문자를 통해 촉구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작동하는 공권력 시스템과 피해자 및 그의 가족들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 마을 공동체이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묘사되는 공권력이 무력하거나 부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윌러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밀드레드에게 “그것은 인권법에 반하는 월권행위”라며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그가 사건에 대해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범인을 찾아 헤맸지만 결과적으로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 속 경찰들은 문자 그대로 최선을 다 했다. 물론 경찰 내에 인종혐오를 비롯한 각종 소수자 혐오를 일삼는 딕슨 같은 경찰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심지어 영화는 중반부에서 윌러비를 자살에 이르게 하며 다시 한번 익숙한 서사를 빗겨나간다. 전형성을 비껴가는 영화는 공권력 시스템의 구멍, 더 나아가 국가 시스템의 구멍을 이야기한다. 

 밀드레드의 복수극 대신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현재의 미국 그 자체이다. 낡은 브라운관 티비와 아날로그적인 유선 전화기가 등장하는 <쓰리 빌보드>는 언뜻 보기엔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처럼 느껴지지만, 영화 초반 등장하는 윌러비의 스마트폰과 후반부 등장하는 구글링이라는 단어는 영화의 배경이 현재의 미국 남부임을 명확히 한다. 언뜻 보기엔 평화로운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가정폭력과 인종혐오를 비롯한 온갖 폭력과 불화가 난무하는 에빙의 삶은 그야말로 트럼프 이후 미국의 축소판과도 같다. 최근에 극장에서 종종 보아온, <로스트 인 더스트>나 <로건 럭키>와 같은 변형 서부극의 연장선에 이 영화가 놓여 있다. <쓰리 빌보드>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서사를 이끌어 간다. 맥도먼드는 공권력이 작동하지 않자 법의 테두리 (혹은 허점) 안에서 그것이 움직일 것을 촉구하고, 공권력이 끝내 한계를 드러내자 그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윌러비의 죽음 이후 각성한 딕슨은 공권력 밖으로 퇴출당한 이후에야 윌러비의 편지와 맥도먼드의 화염병 공격에 의해 각성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마을 공동체와 언론에 의한 2차가해, 인종혐오를 비롯한 온갖 소수자 혐오를 일삼는 인물들로 구성된 시스템이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것에 의문을 품고 공권력 밖에 서고 나서야 그 구멍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를 감상하면서 어딘가 찝찝함이 생겼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결국 자경단이 되어 그들이 찾던 범인과 유사한 범행을 저지른 다른 강간범을 처단하러 간다. 행동하는 그들에게 명확한 확신은 없지만, 어쨌든 우선 행동하며 시스템의 구멍 앞에서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총기를 동반한 그들의 자경단 활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그들이 시스템을 바꿀 수 없는 존재이지만, 시스템 밖의 존재로서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합법적 총기소유 및 이용이라는 테두리 속으로 회귀하는 모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지게 된 찝찝함이 이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러한 아이러니가 영화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경단이라는 선택과 사랑이라는 윌러비의 메시지에 감화되는 딕슨의 모습은 그 직전까지 영화를 지켜보면서 기대하던 반동적인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놀라운 모습과 우디 해럴슨, 샘 록웰의 인상적인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운 작품이지만, 영화가 끝나고 남는 찝찝함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직 스필버그만이 만들 수 있는 걸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