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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01. 2018

고레에다의 가족은 과연 가족일까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스포일러 포함 


 드디어 받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다섯 번의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끝에 황금종려상을 손에 넣었다. <만비키 가족>(좀도둑 가족이라는 뜻, 국내 개봉제목은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과 극의 내용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는 환대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국내에서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의 작품으로 현재 가장 지명도가 높은 일본 감독이다. 아무래도 가족이라는 테마와, 국내 관객들이 일본 영화 하면 쉽게 떠올리는 싱그러운 영화의 룩 때문에라도 고레에다의 작품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열두 번째 작품인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 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연대하며 가족을 이루다가도 어느샌가 그들의 관계가 붕괴되기도 하고, 이러한 가족의 해체를 나름대로 냉철하게 짚어내면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끌어낸다는 것이 고레에다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느 가족>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한 집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업체 노동자 노부요(안도 사쿠라), 남편의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하츠에(키키 키린), 퇴폐업소에서 일하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쇼타(조 카이리)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이들의 공동체에 우연하게 유리(사사키 미유)라는 어린 소녀가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고, 가까운 바닷가로 여행을 가거나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불꽃놀이의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유대감을 키워가는 그들의 생활은 언뜻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츠에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쇼타가 도둑질을 하던 중 붙잡히면서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누군가는 감옥으로, 누군가는 보호시설로, 누군가는 집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의 여러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무도 모른다>를, 할머니-손녀-어느 소녀-어머니뻘의 여성으로 이어지는 여성연대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아버지됨이라는 욕망을 품은 오사무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경찰이 노부요를 취조하는 장면에선 바로 전작인 <세 번째 살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가족>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꽤나 기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령 도둑질 직전에 오사무, 쇼타, 유리 등이 주고받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수신호는 어떤 연대의 상징처럼 등장하지만, 결국 가족의 해체라는 서늘한 풍경을 그려내기 위한 기계적인 장치로서 등장할 뿐이다. 각 캐릭터들이 맡은 역할도 유사하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이 항상 그렇듯, 아버지는 아버지됨을 욕망하는 반면 어머니는 어머니됨을 거부하고 종종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어머니와 아이가 지워지고 아버지만 남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사망한 아버지의 유언을 통해서야 봉합되는 배다른 자매들의 이야기였던 <바닷마을 이야기> 속 아버지상은 <어느 가족>에서도 이어진다. 자신의 본명을 쇼타에게 부여한 오사무의 행동이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소거되고 오사무와 쇼타의 유사부자관계만 남은 후반부가 이러한 아버지상의 연장선상이다. 

 동시에 유리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친어머니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와 유사하게 그려진다. 노부요는 엄마라고 불리길 거부하고, 성녀/창녀 이분법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아키나 애초에 어머니와는 거리가 먼 하츠에 캐릭터는 극 중 아버지로 그려지는 캐릭터에 비해 어딘가 이기적으로 보인다. 물론 노부요가 감옥에 수감됨으로써 어떤 면죄부를 부여받는 듯 하지만, 결국 오사무에게 아버지라는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특히 아키의 캐릭터는 가족의 해체 이후 극에서 실종되어 버린다. 후반부에서 사망 처리된 하츠에와 더불어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창녀, 노인, 특히 오사무와 노부요가 죽은 하츠에를 두고 남편의 연금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다른 가족에게 돈을 받는 것을 두고 욕하는 부분 또한 성녀/창녀 이분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두 여성이 삭제되고, 오사무와 쇼타의 유사부자관계를 부각한다. 유사한 결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아버지됨이라는 욕망을 현실화하는데 일정 부분 성공하고(때문에 쇼타의 “아빠”라는 입모양이 등장하는 영화 끝자락의 쇼트는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여성은 어머니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극에서 삭제되거나 감옥에 갇힌 노부요처럼 배제된다. 더욱이 남자아이인 쇼타에겐 가족 재구성의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학대하는 어머니의 죄를 이어받듯 새로운 가족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여자아이 유리의 모습 또한 대조적이다. 

 결국 고레에다의 영화 속 붕괴되는 가족에서 가장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성인 남성들의 고뇌 사이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그것의 소재로 존재한다. <어느 가족>의 가족이 붕괴되기 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그들이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을 때이다. 그 아름다운 순간 사이 쇼타의 시점 쇼트로 비키니를 입은 아키의 가슴이 클로즈업되고, 오사무는 쇼타에게 “가슴이 좋지?”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고레에다의 가족에서 여성의 위치는 무엇인가, 아이의 시점은 누구의 시점을 대리하는가, 영화 속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대상화되는 것은 누구의 신체인가를 고려해보면 그의 영화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진다. 이것이 고레에다만의 가족관인지, 아니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와 그의 영화에 지지를 보내는 서양 평론가들)의 가족관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영화 속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 중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재기의 기회가 누구에게 주어지는지 고려해보면 그가 다루는 인간성이 어디에 국한된 것인지 추측할 수 있다. <어느 가족>이 고레에다의 집대성이라면, 이러한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점점 지지하기 어려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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