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피터스 문> 코르넬 문드럭초 2017
유기견 이야기를 다룬 <화이트 갓>을 통해 이름을 알린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신작 <주피터스 문>이 개봉했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작품으로, 헝가리의 난민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는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들이 헝가리의 국경을 건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 중 하나인 아리안(솜버 예거)은 아버지와 함께 국경을 넘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아리안은 국경 경찰 라슬로(기오르기 세르하미)의 총에 맞고 쓰러진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한편 난민캠프의 의사인 스턴은 급전이 필요해 뒷돈을 받고 난민들을 외부 병원으로 빼돌리고 있다. 우연히 하늘을 나는 아리안의 능력을 목격하게 된 스턴은 그를 데리고 캠프를 빠져나가고, 아리안을 이용해 돈을 벌 궁리를 한다. 그러나 아리안 부자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지목되면서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간다.
<주피터스 문>은 메타포로 가득하다. 스턴은 자신의 출근길을 가로막는 종교인들에게 “성경에는 강간과 학살로 가득하다”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늘을 나는 아리안을 목격한 뒤 천사를 신봉하게 된다. 스턴뿐만 아니라 아리안의 능력을 목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공중의 뜬 아리안을 보며 병상의 노인은 기적을 목격했다 생각하며 숨을 거두고, 길거리의 부랑자는 천사가 나타났다며 그를 숭배하고, 투병 중인 부자는 그를 목격한 뒤에 치유된다. 어느 범죄자는 그를 보고 겁을 먹어 자살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주피터스 문>에서 난민이라는 존재가 가시화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아리안처럼 어떤 능력을 지녀 모두의 눈에 목격될 수 있는 위치에 존재하거나, 테러를 일으켜 뉴스에 보도되거나. 산만하게 흩뿌려진 메타포 속에서,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은 아주 나이브한 방식으로 난민을 그려내고 있다. 초능력을 통한 가시화라는 설정에서부터 이들은 중력을 거슬러야만 보이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상당히 난잡한 촬영이나 쉽사리 납득 가지 않는 두 주인공의 감정선 또한 <주피터스 문>의 단점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마지막까지 카메라는 거의 고정되지 않는다. 땅에서는 두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기에 바쁘고, 하늘을 나는 아리안을 따라갈 때는 <크로니클> 같은 영화의 정신없는 촬영을 연상시킨다. 카메라가 안정적으로 인물을 잡는 순간은 아리안과 스턴이 안전한 공간에 있을 때뿐이다. 그들의 동선을 쫓아가기 위해 종종 불필요한 움직임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령 스턴이 캠프에 가는 첫 장면에서 딱히 열릴 이유가 없는 문이 카메라가 이동할 공간을 열기 위해 열린다거나, 다른 장면에서 별 다른 이유 없이 여성의 엉덩이를 클로즈업하여 따라가는 쇼트도 등장한다. 어떤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려 한다기에는 불필요한 움직임이 너무 많다. 이는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기어이 접합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의 불안정한 상태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영화 내의 세계가 움직이는 것보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결국 그들은 카메라가 허락한 공간에서만 안정적이게 된다. <주피터스 문>의 카메라는 이를 증명하려는 듯 종종 인물들을 앞질러 나아가기도 한다.
결국 <주피터스 문>은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나이브함만이 드러난 작품이다. 초능력을 이용해 약자들을 가시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연상호 감독의 <염력>이 연상되기도 한다. 두 작품이 지닌 한계 또한 유사하다. 메타포로 점철된 영화 속에서 결국 주인공을 제외한 난민들은 다시 한번 비가시화된다. 천사라는 신화적인 메타포는 구원도 희망도 되지 못할 뿐이다. <화이트 갓>에서 유기견들이 부다페스트의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처럼 잘 짜인 난장판이 아닌, 그저 혼란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으로만 보인다. 여러모로 단점만 눈에 띄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