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최국희 2018
IMF를 정면으로 다룬 한국 상업영화는 아마 <국가부도의 날>이 처음일 것이다. 장편 데뷔작 <스플릿>으로 볼링이라는 소재에 도전했던 최국희 감독은 다시 한번 쉽지 않은 소재를 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상흔이 남아있는 IMF사태 직전의 일주일을 다룬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의 한시현(김혜수), 금융투자회사에서 일하다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는 윤정학(유아인), 국가부도사태를 통해 권력을 탐하는 재정부 차관(조우진), 공장을 운영하는 소시민 갑수(허준호)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경제위기를 예측한 사람과 이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빅쇼트>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블랙코미디 대신 진지한 드라마를 선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기본기에 충실하다. 한시현과 재정부 차관 등이 자리한 회의 장면과 어음으로 계약하는 갑수, 자신의 고객들에게 위기가 기회라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는 윤정학의 모습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되며 97년 당시의 상황을 관객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한다. 물론 계속 쏟아지는 경제용어들이 지닌 진입장벽은 있지만, 여전히 IMF사태를 기억하는 관객들이나 현재의 경제 불황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장면에서의 교차편집은 영화 전체로 확대된다. 한시현, 차관, 윤정학, 갑수의 상황이 번갈아 가며 제시되고, 국가 전체의 침몰로 이들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갑수의 상황에 많은 관객들이 가장 몰입할텐데, 그가 대표하고 있는 소시민의 상황은 대다수의 관객들이 경험했던, 혹은 간접적으로 보고 들어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허준호의 연기는 온몸으로 당시의 상황을 받아내고 있다는 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빚을 갚지 못해 수감된 동료를 면회하고 온 갑수가 거리를 걷는 장면은 (아마 90년대 느낌이 남아있는 어느 거리에서 촬영된 것이겠지만) 현재의 거리에 97년의 갑수가 당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CG 등으로 배경 전체를 덮어 씌우는 대신 현재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공간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IMF사태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역시 김혜수가 연기한 한시현이다. 한시현의 행보는 종종 <더 포스트>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남초 사회인 재계,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시현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여성 영웅으로써의 한시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는 현실 때문에 한시현이 금융위기를 막는 서사로 나아가진 못하지만, 그와 같은 인물이 여전히 존재하며 다가올 위기에 맞설 미약하지만 필요한 용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시현을 한국영화 속 여성 영웅으로 부르는 것은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특히 에필로그에서의 특별한 인물과의 만남이라던가, “계집애는 어쩔 수 없다”라는 재정부 차관의 성차별적 발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이어가는 장면은 한시현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그가 자신의 팀원들과의 연대적 관계에도 주목해 볼만하며, “여자들은 감정적이어서 안 된다”는 남성 캐릭터의 발언과 대비되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감정적인 남성들과 이성적 협상을 우선시하는 한시현의 대비도 적절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유아인의 연기다. 그가 연기한 윤정학은 분석력과 실행력을 두루 갖춘 캐릭터인데, 그의 캐릭터는 최대한 이성을 붙잡으려는 한시현 캐릭터와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굉장히 감정적인 이 캐릭터는 종종 과잉의 순간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아인이 연기하는 과잉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베테랑>의 조태오 이후 유아인이 연기한 캐릭터들에서 조태오스러움을 반복적으로 발견하고 있다. 과잉된 연기가 그의 주된, 그리고 유일한 캐릭터로 남은 것 같은 인상이다. 때문에 차분하게 쇼트를 쌓아가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홀로 감정과잉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선보이는 유아인의 연기는 완벽한 에러다. 김혜수와 허준호를 비롯해 조우진, 류덕환, 권해효, 박진주, 그리고 뱅상 카셀 등의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영화의 톤을 뒷받침해주는 것과 다르게 유아인은 홀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러한 괴리감이 에필로그에서의 이야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연기가 어울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