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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2. 2018

물질화되는 기억의 기록

<공사의 희로애락> 장윤미 2018

 영화는 용접 불꽃과 거대한 쇳덩어리로 가득한 어느 작업장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 남성의 인터뷰 음성이 보이스오버로 등장한다. 프레임 속의 누군가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순간 카메라를 든 장윤미 감독의 목소리가 “아빠”라며 누군가를 부른다. 장윤미의 첫 장편영화 <공사의 희로애락>의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다. 70년대부터 40년 넘게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거제, 구미, 광주 등을 오가며 수많은 건축물에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삶의 흔적을 쫓아가는 영화는 사적인, 그렇기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꺼내 든다.

 건설노동자는 건축가가 아니다. 그들은 도면에 그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평면 속의 형상을 건축물로 제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완성된 건축물엔 그들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재들을 직접 만지면서 건물을 쌓아 올린 노동자들의 기억은 건축물 안에 남겨져 있다. 기억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건축물을 통해 기록되는 것이다. 영화 속 아버지는 40여 년이 지난 일들을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그가 노동자로 참여한 건축물은 그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장윤미는 아버지와 함께, 또는 홀로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과 노동을 위해 오간 길로 향한다. 예천 시장의 아케이드, 거제 조선소의 기숙사와 같은 건물들, 광주에 있는 어느 기업의 건물 등은 건축 당시와 똑같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장윤미의 아버지는 거기서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읽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외면을 지닌 건축물은 아버지의 기억과 상호작용하며 사적인 모뉴먼트가 된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장소가 죽은 할머니, 아버지의 어머니의 묘와 생가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묘지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게 되는 건축물이자, 산 어딘가에 숨어 가끔씩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모뉴먼트이다. 건축물을 통해 되살아나는 기억은 삶을 경유해 종착지로 보이는 공간으로 향한다. 딸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다시 쫓아가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내뱉는 순간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묘지라는 공간과 관객의 머릿속에서 결합한다. 결국 건축물 안에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게 될 어느 건설노동자의 삶은 이 순간 사적인 삶의 궤적에서 뛰쳐나와 보편의 공간으로 향한다.

 장윤미는 서울과 구미, 광주, 거제 등을 오가는 길을 끈질기게 기록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맨 앞자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은 아버지가 노동을 위해 오갔던, 아니 오가는 길조차 노동이었던 순간의 기록이다. 건설노동자의 삶은 건축물에도 남지만, 같은 길을 반복해서 오가는 다른 영역의 노동자들처럼 자신이 오간 길에도 존재한다. 도로 위에서도 트럭, 레미콘, 포크레인 같은 건설용 차량에 시선이 머무는 장윤미의 카메라는 도로 위의 경험을 사적인 것으로 맥락화 한다. 핸들을 조작하는 버스 운전사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와 운전하는 아버지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는 길 위에서의 반복적인 이동 또한 노동의 과정임을 밝힌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길 위에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노동착취와 기업들의 노동자 착취 등을 읽어낼 수 있다. <공사의 희로애락> 속 도로의 재맥락화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가장 사적이기에 보편을 향한다.

 최근 많은 한국 독립다큐들의 감독 자신 혹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사적영역의 이야기를 공적영역, 보편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 이원우의 <옵티그래프>, 성향은 조금 다르지만 라야의 <집의 시간들>이나 김보람의 <개의 역사>도 이러한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장윤미 감독은 <콘크리트의 불안> 등 자신의 전작을 통해 드러낸 건축에 대한 관심을 통해 사적이기에 보편이 되는 경험을 한국 현대사 안에서 재맥락화 한다. 장윤미는 영화 중간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이 늙어 보인다는 아버지를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아버지 또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카메라 뒤에 선 딸의 모습을 찍는다. 이 모습은 영화의 마지막 쇼트, 카메라를 정리하는 딸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물질화된 기억으로 (정확히 말하면 비물질적 디지털 메모리지만, 사진을 찍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진을 물질적 기억으로 간주하기에) 담을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삶을 영화로 기록하려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딸의 모습과 공명한다. 비물질적인 기억을 건축물이라는 물질 속에서 되새기려는 <공사의 희로애락>의 시도는 서로의 사진을 찍는 부녀의 모습을 통해 영화 전체의 태도로 확장된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장윤미 감독은 쏟아지는 유사한 테마의 작품들 속에서 자신만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공고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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