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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6. 2018

'시대의 공기'란 무엇인가

<로마> 알폰소 쿠아론 2018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향한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가 소규모 극장 개봉과 함께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이번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한 중산층 가정집의 가정부인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쿠아론은 영화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 중 하나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을 키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로마>를 통해 펼쳐 보이려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 멕시코의 한 도시, 카메라는 물청소 중인 어느 바닥을 비추고 있다. 물에 의해 비친 천장의 창문을 통해 종종 비행기가 지나가고, 물결을 따라 창문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카메라가 틸팅 하며 청소하는 클레오를 비추며 영화가 시작한다. 

 쿠아론이 직접 촬영을 맡은 카메라는 클레오가 보낸 1년여간의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엔 같은 시기 한국을 연상시키는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 클레오 고용주 가족의 이혼, 클레오의 임신 등 다양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종종 클레오의 시선에서, 종종 그를 관찰하는 시선에서 움직인다. 청소하는 클레오의 모습을 땅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빨랫감을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의 모습을 올려다보는 틸팅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수평의 트래킹이나 패닝, 고정된 쇼트로만 담기던 클레오의 모습은 처음과 마지막에서만 상승의 순간 안에 놓이게 된다. <로마>의 이러한 촬영은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그간 알폰소 쿠아론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촬영감독을 맡은 임마누엘 루베츠키의 카메라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쿠아론의 작품은 아니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레버넌트>를 연상시키는 촬영이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촬영은 클레오를 적극적으로 영화 속 풍경으로 위치시킨다. 

 안정적으로 1970~71년의 멕시코를 풍경화시키는 <로마>이 촬영은 몇 차례 그러한 안정성이 흔들리는 촬영을 보여준다. 클레오 고용주 가족의 아빠가 차를 몰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클레오의 애인인 페로민(조지 안토니오 구레로)이 성기를 들어낸 채로 배운 무술을 자랑하는 장면. 두 순간은 인물들을 풍경화시키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굉장히 남성적인 순간으로 다가온다. 돌출된 이 두 장면은 클레오의 인생에 큰 변곡점을 만들어낼 인물들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두 남성이 돌출되는 모양새로 등장하는 반면, 클레오와 나머지 고용주 가족 등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풍경으로 존재한다. 영화의 마지막, 포스터에 등장하는 해변 장면이 되어서야 클레오는 풍경에서, 풍경을 뚫고 헤쳐 나오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전까지 카메라가 클레오나 고용주 가족을 그리는 방식은 매우 평면적이다.

 특히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과 클레오의 출산이 겹치는 장면에서 무덤덤하게 인물을 따라가기만 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압축하여 그 시대에 박제한다. 영화 중반부 잠시 등장하는 개의 머리 박제들과 클레오를 비롯한 인물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로마>가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생각해볼 때, <로마>의 이러한 촬영은 쿠아론이 지닌 당시 기억을 통해 그 시대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많은 평자들이 <로마>를 두고 ‘시대의 공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문제는 ‘시대의 공기’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작품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로마>가 그려내는 ‘시대의 공기’는 1970년이라는 시간에 인물을 박제시킴으로써 발생한다. 인물을 시대에 묶어 두고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영화 속 ‘시대의 공기’라면, <로마>는 인물들을 풍경화하여 박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로마>의 마지막에서 파도를 뚫고 나가는 클레오의 모습은 풍경화된 평면을 뚫고 나온다. 오프닝과 이어지는 엔딩의 틸팅을 통해 상승하는 클레오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프닝에서 예고된 엔딩일 뿐, 영화는 내내 오프닝에서 제시된 관점을 따라간다. 오프닝에서 물에 비친 창문 속 하늘은 물이 흔들림에 따라 계속해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클레오가 바닥 타일에 낀 때를 쓸 때마다 물은 조금씩 탁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클레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클레오를 바라보는 것, <로마>에서 쿠아론이 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것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것인지, 쿠아론이 자신을 성장시킨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읽어야 할지, 시대에 박제된 사람들을 관찰하는 이야기로 볼 것인지는 <로마>를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다만 루베츠키의 방식을 따라가는 쿠아론의 촬영은 인물을 그리는 것에 있어서 쿠아론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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