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연출, 윤여정 주연의 <죽여주는 여자>
<다세포 소녀>의 그 이재용 감독이 맞다. <정사>로 장편영화 데뷔한 이후 <여배우들>,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두근두근 내 인생> 등 낙차가 큰 필모그래피를 그리고 있는 이재용 감독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왔다. 수작과 범작, 망작을 오가는 이재용 감독의 영화들 중 이번 영화가 그의 최고작이자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박카스 할머니라는 소재만 알고서는 자극적이고, 어딘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의 날카로운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직접 본 영화는 정 반대였다. 자극적인 장면이 아예 없진 않지만 무미건조하게 그려져 상황의 평범성을 강조하고, 노인 빈곤층이자 성 노동자인 소영(윤여정)의 이야기만 다룬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티나, 장애인 도훈(윤계상), 코피노 아이 민호, 외국인 노동자,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계속해서 등장시키고 짧게나마 언급한다.
사회적 약자들, 마이너 그 자체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데 영화 자체는 그것의 평범성을 그린다. 사회의 메이저라고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하류인생 혹은 밑바닥이라고 부른다. 헌데 그 밑바닥 인생들에게 서로의 차이점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하다. 성소수자, 노인, 혼혈, 장애인 간의 차별이 없는 곳은 그들이 모인 티나의 집이었다. 집의 첫 등장을 부감으로 시작해 작은 마당까지 쭉 훑으며 들어오는 카메라 무빙이 인상적이다. 다소 툭툭 끊기는 편집들 속에서 매끄럽게 흐르던 그 쇼트가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영을 쫓아간다. 영화 중간 중간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퇴장하고, 각 캐릭터들의 삶은 소영의 삶만큼 기구하며, 몇몇의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짧게 등장했다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영화가 먼저 끝난다. 관객들은 겉만 보고 이야기를 하는 TV뉴스 대신 소영의 행적을 쫓아 서울 한복판의 마이너들을 만난다. 소영의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끝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누군가가 죽는 다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듯.
그렇기에 <죽여주는 여자>라는 제목과, 소영이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고객들을 진짜로 죽여준다는 시놉시스가 맥거핀처럼 느껴진다. 물론 영화가 소영의 뒤를 쫓아가기 때문의 관객들은 소영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소영의 이야기 역시 영화 속 마이너들의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재용 감독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마이너들의 연대가 보여주는 평범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부분이었지만, 이런 연대의 필요성을 보여준 장면이 있다. 영화 속 TV뉴스의 한 장면으로 ‘백남기 농민 물대포 맞고 쓰려져’라는 기사가 스쳐지나간다. 자신이 메이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직접 시위에 나서고 물대포를 비롯한 국가폭력을 눈과 귀와 피부로 접한 사람들을 마이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마이너가 연대해 메이저가 된 세상, 영화 속 티나의 집이 그 모습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접한 좆같은 뉴스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요양원에서 공익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 속에서 등장한 요양병원 장면이 너무 익숙한 장면이었다. 치매와 중풍에 인지능력을 잃은 어르신들을 보며 하던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맞춤양복을 차려입고 종로를 누비던 사람이 중풍에 쓰러져 똥오줌조차 가리지 못하는 상태, 대사를 인용하자면 “사는 게 창피한”상태가 나에게 찾아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큰 기대 없이 극장을 찾았다 좋은 작품을 봤을 때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그런 기분 좋음과 영화가 주는 상반된 감상이 뒤섞인 맥주 맛이 요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