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7. 2019

<더블 네거티브: 화이트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

 비디오 대여점 체인이었던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TV쇼와 영화계의 판도가 바뀌었다. VOD 서비스 등으로 극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화 배급망의 형성이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빠르게 진행되었고, TV쇼 시즌 전체를 한 번에 공개하는 넷플릭스의 방식은 ‘빈지워칭’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상황은 2017년 넷플릭스가 제작한 봉준호의 <옥자>가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2018년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미국의 ‘아시안 어거스트’를 주도한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나 4500만 뷰의 조회수를 기록한 <버드 박스> 등의 흥행,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나 마블과 함께한 <디펜더스> 시리즈의 흥행, 심지어 한국, 일본, 인도, 유럽 등 각 지역에 맞는 오리지널 영화와 시리즈들의 제작까지 넷플릭스는 기존의 TV와 영화의 배급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더욱이 오손 웰즈의 유작 <바람의 저편>을 발굴, 복원 및 후반 작업하여 공개한 것은 2018년 영화계의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이었다. 오손 웰즈의 유작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타이틀을 달고 공개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결국 넷플릭스는 영화관이라는 다크큐브를 필요로 하지 않는 플랫폼, 비디오용 B급 영화에서 시작하여 VOD를 통해 이어지던 양상이 더욱 가속화되고 더 이상 (산업적인 의미의) B급 영화에서 머무르지 않는 작품들로 구성된 라이브러리를 갖춘 플랫폼이 되었다. 

 다크큐브를 필요로 하지 않는 플랫폼이 넷플릭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면, 화이트큐브를 필요로 하지 않는 미술이 등장한 것은 60~70년대 즈음이다. 물론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화이트큐브 안에서의 작품 관람을 방해하는 마르셀 뒤샹의 <일 마일의 줄>이나 구멍을 통해 작품을 관음적으로 관람케 하는 <주어진 것: 1) 폭포, 2) 가스등>, 또는 거울을 사용한 허버트 베이어나 프레데릭 키슬러의 디스플레이 방식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다만 여전히 화이트큐브라는 공간을 필요로 한 방식이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모더니즘의 끝자락인 60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즘은 ‘건축적 조각’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했고, 이는 댄 그레이엄의 퍼빌리온 작업이나 고든 마타-클락의 건축물 절단 작업, 로버트 스밋슨, 월터 드 마리아, 크리스토 자바체프 등의 대지미술 혹은 거대한 스케일의 설치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들의 작업은 당연하게도 화이트큐브 안에서 성립할 수 없으며, 소수의 관객만 그들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대신 이들의 작품을 촬영한 사진과 기록영상, 작업노트 등이 화이트큐브에 전시된다. 이들의 작품은 작품 자체로 화이트큐브에 전시되는 것이 아닌 사진과 영상, 카탈로그 등을 통해 화이트큐브로 유통된다. 여기서 화이트큐브는 작업에 대한 기록물 내지는 파생 작품 등을 유통시키는 장소가 된다. 넷플릭스가 다크큐브라는 중심적 공간을 빗겨나가 듯이, 화이트큐브에서 벗어난 작품들 또한 화이트큐브라는 중심에서 빗겨나 있다.

 <더블 네거티브: 화이트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이하 DNWN)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와 화이트큐브 밖의 작품 등 탈중심적 공간을 찾아 표류하는 작품들에 대한 담론을 이어간다. 마이클 하이저의 대지미술 작품에서 따온 ‘더블 네거티브’라는 제목은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상황을 포괄한다. 미국 네바다 주 사막에 설치된 <더블 네거티브>는 사진을 통해 화이트큐브에 유통되었다. 사진과 그 사진을 담은 카탈로그로 유통되고 기억되는 마이클 하이저의 작업은 화이트큐브라는 중심적 공간에서 이탈한 상태로 존재한다. <더블 네거티브>는 사막에 거대한 계곡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절벽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내고, 절벽들은 맞닿지 않는 두 개의 수평선을 만들어내며, 그 사이의 구덩이는 두 수평선 사이의 중심이 아닌 공간을 형성한다. DNWN은 화이트큐브와 넷플릭스라는 두 개의 공간/장소/플랫폼을 <더블 네거티브>의 수평선으로 상정한다. 화이트큐브/다크큐브라는 기존 예술의 중심적 공간과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탈중심적(이면서 새로운 중심을 개척하는) 공간. DNWN은 그 사이 무수하게 존재하는 공간들을 떠도는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연구이다.

 DNWN의 개별 작품들이 대단히 새롭다거나 흥미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작품은 화이트큐브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액정/벽화/게임/기존 작품의 일부/TV 액정 등의 내외부를 탐색하는 작품들은 (일단) 화이트큐브 안에 놓인 자신들의 위치를 불안정한 위치로 재정립한다. 가령 장서영의 <이건 결국 반사와 난반사의 문제>는 스마트폰 액정의 영상과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을 통해 굳이 화이트큐브에 놓이지 않아도 되는 작품을 스마트폰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액정 속으로 다시 위치시킨다. 송다슬의 <3 sets of flakes>는 카메라가 달린 장치로 촬영된 화면을 재촬영하여 얻어진 평면들을 다시금 스크린 속에 위치시키며 가상의 세트를 만들어낸다. 이주리의 <선셋 벨리>는 TV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러 색채의 빛이 화이트큐브의 벽과 TV 액정 내부의 공간을 동시에 점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미례와 크리스토퍼 마흔의 <크리스토퍼의 돌>은 내러티브의 시작과 끝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동시에 비선형적으로 내러티브를 읽어도 상관없는) 형태의 벽화를 통해 픽션의 위치를 교란한다. 강정석의 <GAME I: Speedrun Any % PB>는 질주하는 게임 스트리밍 영상과 모션 데이터만큼 정확한 트와이스의 안무 직캠 영상을 혼재하여 스크린 평면에 갇힌 1인칭 시점 게임의 아바타의 위치를 드러낸다. 아르코 미술관의 화이트큐브 밖의 공간인 웹사이트(http://double-negative.xyz/)를 제3의 전시공간으로 사용하는 홍진훤의 <Old Bridge v.1.02>는 다른 작품들의 개념적 이미지와 화이트큐브/다크큐브라는 중심적 공간을 벗어난 이미지와 문장들을 불안정하게 늘어놓는다.

 DNWN의 작품들은 화이트큐브 안에서 화이트큐브라는 위치를 벗어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더욱이 관객의 동선을 유도하려는 가벽이나 화이트큐브 안에서 영상작업을 상영하기 위한 임의적인 다크큐브 등을 배제하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점멸하는 조명을 통해 화이트큐브 공간을 비-관습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낸다. 화이트큐브와 넷플릭스라는 두 개의 수평선이 만들어낸 중심적 공간에서 벗어난 비-관습적인 위치에 대한 연구, 화이트큐브 안에서 ‘화이트큐브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질문을 이끌어내는 시도라는 점에서 DNWN은 주목해봄직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넷플릭스를 통해 작품의 플랫폼이 다원화됨과 동시에 새로이 중심화된다는 의견을 이끌어낼 수도 있고, 대안공간/블로그/인스타그램/웹페이지 등 다양한 플랫폼 사이를 물리적/정서적으로 오가는 신체를 통해 형성된 느슨한 링크를 탐색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해진 장소는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고정된 정체성을 의심하며, 위기와 평온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불안정한 공간이다.” DNWN의 카탈로그에 적힌 이 문장이 이번 전시가 드러내는 ‘위치’에 대한 담론을 축약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란시스 알리스: 지브롤터 항해일지> 아트선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