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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9. 2019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태도

<강변호텔> 홍상수 2018

*스포일러 포함


 <강변호텔>은 처음부터 강렬하고 잔혹하다. 강한 햇빛을 받으며 호텔방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시인 영환(기주봉)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죽음, 후회, 체념으로 가득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그는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 두 아들을 불러 놓고 기다리던 중이다. 한편 상희(김민희)는 자신을 찾아 호텔로 온 연주(송선미)와 함께 수다를 떨고 낮잠을 자고 산택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영환은 아들들을 기다리며 산책을 하다 상희, 연주와 대화를 나누고, 두 아들을 만나 그들과도 대화를 이어간다.

 익숙한 홍상수의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강변호텔>은 또 다른 홍상수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우선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은 촬영이 등장한다. 그것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렬한 흑백 콘트라스트의 화면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이 보인다. 95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는 죽음의 징후는 오프닝 쇼트의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변호텔> 속 죽음은 <풀잎들>이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자유의 언덕> 등에서 드러나는 죽음 혹은 유령과는 조금 다르다. <강변호텔>은 홍상수의 유령들이 떠돌던 폐쇄된 미로들과는 다른, 죽음이라는 소실점을 정확하게 응시하며 진행되는 직진의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응시하며 마지막 남은 아름다움을 찾아다니고, 경수와 병수는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기는커녕 두려워하며 그것에서 멀어지려는 말만을 던진다. 반면 상희와 연주는 이미 죽음에서 해방된 마냥 남성들을 향해 조소를 보내고, 관조하고, 때로는 동조하기도 한다. 상희와 연주는 다른 세 캐릭터들과 한 공간에 존재하긴 하지만, 경수와 병수는 (심지어 연주가 경수의 장갑을 훔쳤음에도) 이 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영환은 죽는다. 개인적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GV를 통해 듣기로는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 이후로 처음) 죽음이 직접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다. 영환은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응시하던 죽음으로 그대로 직진한다. 영환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징후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영환과 두 여성 캐릭터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내린 눈은 초현실적인, 일견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 장면에서 분명 강은 얼어 있고, 그 위에 흰 눈이 쌓여 있다. 그 뒤 호텔로 돌아온 영환은 두 아들은 만난다. <강변호텔>은 만 하루 동안의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강은 흐르고 있다. 영환이 홀로 산책하는 플래시백(으로 추정되는) 장면에서는 다시 강이 얼어 있다. 흐르는 것과 정지된 것, 고정된 카메라 대신 어깨에 메고 촬영해 흔들리는 카메라. 단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움직임, 생에 관심을 두며 죽음이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려는 이들은 더더욱 지금에 고정되어버린다. 반면 죽음을 응시하거나 그것에 개의치 않아하는 인물에겐 정지된 삶 혹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세한 진동이 허락된다.

영환만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전진한다. 얼어붙은 강은 정지된 듯 보이지만 계속 흐르고 있고, 녹은 뒤 다시 흘러갈 것이다. 영환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 흘러갈 것이다. 마치 상희가 애인에게 버림받은 뒤 연주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환은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 미장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들을, 경수는 ‘병신’이라면서 놀리지만 영환 자신이 부여한 병수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실패 또한 사랑의 한 부분임을 모두 끌어안으려 한다. 영환이 마지막으로 낭독한 시의 주인공 피터(신석호)의 모습은 흐릿하게 포커스아웃 된 모습으로만 볼 수 있다. 숨을 거두어가는 영환의 모습 또한 포커스아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사 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한 사람이 되고, 흐릿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응시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과의 연대만이 함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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