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마법조차 기능하지 못하는 현실

<행복한 라짜로> 알리체 로르와커 2018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스포일러 포함


현재 극장에서 상영되는 <행복한 라짜로>의 예고편에는 별 다른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라짜로”라는 이름만이 예고편 내내 반복된다. 영화의 첫 대사 역시 “라짜로”이다. 125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의 주인공인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이름은 수없이 호명된다. 그와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소작농들은 그에게 다양한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 소작농들을 부리는 후작인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는 담배 재벌인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호명한다. 라짜로라는 이름은 성경 속 나사로(Lazarus)를 연상시킨다. 예수의 호명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 구원의 전조로 받아들여지는 이름이다. 라짜로가 일하고 거주하는 담배농장은 소작이 금지된 이후에도 땅주인인 데 루나 후작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이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은폐하며 계속 소작농으로 살게 하는 곳이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공간은 ‘염전 노예 사건’ 등을 연상시키는데, 영화 속에서는 공권력 대신 신부가 등장하여 이 공간을 유지한다. 소작농 마을의 안토니아(아그네즈 그라지아니)는 후작의 저택 곳곳에 숨겨진 순교자들의 초상화를 라짜로에게 소개해준다. 그리고 정확히 영화의 절반이 흐른 지점에서, 라짜로는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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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짜로의 추락 이후, 라짜로와 탄크레디의 가짜 납치 공모 때문에 마을을 찾은 경찰에 의해 담배 재벌이 벌인 대사기극이 들통난다. 주민들은 도시로 거처를 옮겨가고, 담배 재벌은 몰락한다.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진 라짜로가 눈을 뜬다. 시티폰을 쓰던 대에서 스마트폰을 쓰는 시대로 시간이 흘렀고, 라짜로와 함께 살던 주민들을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라짜로는 절벽에서 추락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이다. 라짜로의 추락은 주민들의 구원으로 이어졌다. 라짜로의 순교는 소작농 마을을 찾아온 경찰에 의해 그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도시로 거처를 옮긴 이들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트레일러나 물탱크를 개조해 살아가고, 후작의 저택에 있던 물건들을 훔쳐 팔거나 강도행위를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 라짜로의 순교는 온전한 구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라짜로의 부활에서 지배권력과 결탁했던 종교는 지워지고, 대신 공권력의 치안에 의해 유지되는 계급이 빈자리를 채운다. 나사로의 부활은 종교적 구원을 예지했으나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짜로의 부활이 예지한 계급적 구원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국경의 난민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경매하며 소작농들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소작농들은 도시의 빈민이 되었다. 성당을 벗어나 라짜로와 빈민들을 따라오는 성가는 간단한 위로를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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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짜로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일종의 타임슬립은, 라짜로의 시점에서 보자면, 순식간의 소작농들을 도시의 빈민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영화에 잠시 등장하는 난민들의 처지도 비슷하다. 이들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순식간에 옮겨진 사람들이다. 이것은 계급 간의 추락이 아닌 이동의 순간이다. 순교, 부활, 구원의 마법적인 서사마저도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리얼리즘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후작 부인을 겨냥할 무기라던 새총을 들고 은행을 찾은 라짜로의 얼굴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부활하던 순간 나타났던 늑대가 다시 나타나고, 라짜로가 숨을 거두자 늑대는 은행 밖으로 나가 유유히 도시를 돌아다닌다. 라짜로는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예수의 자리엔 착취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이 들어가고, 마법적(혹은 종교적)으로 도래한 구원의 순간은 또다시 지연된다. 탄크레디는 기침하는 것이 담배를 펴야 한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미봉책을 믿으며, 한없이 지연되는 구원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지금이다. 라고 <행복한 라짜로>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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