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23. 2019

그 야만의 시간이 향하는 곳

<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 2019

*스포일러 포함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 <아이리시맨>이 극장에서 제한적으로 개봉했다. 러닝타임 209분의 대작인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디파티드>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갱스터/마피아 영화이다. 찰스 브랜드의 논픽션 [I Heard You Paint Houses]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2차 대전 이후 트럭 운전수로 일하던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가 러셀(조 페시)을 만나 살인청부업자가 되고, 트럭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자 마피아와 결탁하고 있던 지미(알 파치노)와 함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9분의 러닝타임은 프랭크의 기나긴 일생을 빼곡하게 담아내고 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년의 프랭크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하며, 어느 정도 나이 든 프랭크와 러셀이 어딘가로 향하는 타임라인과 트럭 운전수인 프랭크가 범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는 타임라인, 총 세 개의 타임라인이 무수한 플래시백을 동반하며 영화가 진행된다.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의 다른 갱스터/마피아 영화, 가령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처럼 냉혈한들의 세계를 강렬하게 그려내는 영화는 아니다. 세 개의 타임라인을 주축으로 진행되는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잠시 스쳐갈 뿐인 인물들에게는 잠깐의 정지 프레임과 함께, 이들의 이름, 사망연도, 사인이 적힌 자막이 등장한다. 사실 영화 속 비중에 상관없이, 범죄에 가담한 거의 모든 인물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단지 이들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가 자막을 통해 고지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마틴 스콜세지는 프랭크, 러셀, 지미를 비롯한 범죄자들의 삶을 치열하고 강렬하며 열정적인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각 인물이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카메라는 이들을 응시하기만 한다. 놀랍게도 이번이 스콜세지와의 첫 협업인 알 파치노를 제외하면, 스콜세지의 여러 영화들에서 넘치는 활력을 보여주었던 배우들은 그 활력의 흔적만을 가진 채 움직이고 있다. 

 물론 긴 시간대를 다루는 작품인 데다가 디에이징 기술을 통해 주연들의 젊은 모습을 표현한 만큼, 일흔을 훌쩍 넘긴 배우들의 연기가 예전만큼 활력 넘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스콜세지는 이 지점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기술을 통해 젊어진 이들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없지만, 종종 이들의 얼굴에는 활력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얼굴에는 죽음의 징후만이 담겨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며, 죽고 싶지 않아 연합과 배신, 협상과 협박을 일삼는 이들의 얼굴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영화가 친절하게 자막으로 고지해주는 인물들의 죽음과 같은 것이 언제든지 엄습할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그렇다고 그것에 절망한다거나, 맞서 싸우거나,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아이리시맨>이 보여주는 것은 아주 깊은 허망함이다. 영화는 이미 지나간 이들의 시간을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타임라인에서 과거부터 설명해내는 방식을 택한다. 요양병원에 있는 말년의 프랭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의 형식은 허망함 속에 빠져 있는 말년의 남성에게 남은 것은 과거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타임라인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1975년, 즉 프랭크가 지미를 죽이는 타임라인에 가까워지다 흡수된다. 프랭크가 지미를 죽이는 타임라인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던 요양병원의 타임라인으로 흡수된다. 합쳐지는 타임라인들은 영화와 프랭크가 이미 제시된 결말을 향해 고요히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가장 먼 과거에서 시작되는 타임라인과 1975년의 타임라인이 만나는 지점, 즉 프랭크가 러셀의 사주를 받아 지미를 살해하고 돌아오는 장면은 지독하게 느리게, 그리고 프랭크가 지나가는 모든 길을 놓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람이 또 다른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람을 죽이라고 사주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프랭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후회도 절망도 참회도 아닌, 정해진 트랙을 따라가는 기차처럼 그곳으로 향할 뿐이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프랭크가 배제한 어떤 것들, 그의 허망함을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가령, 이 영화에서 프랭크와 지미의 자녀들의 대사는 거의 후반부에 가까워져서야 등장한다. 프랭크의 딸 중 페기의 아주 짧은 대답들을 제외하면, 프랭크와 지미의 자녀들은 러닝타임의 2/3 가량 대사가 없다. 이들은 아버지의 ‘일’에 따라 생활하고, “지켜준다”는 말을 통해 배제된다. 209분의 러닝타임은 남자들의 일대기임과 동시에 이들이 배제하고 감춘 이들이 목소리를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의 마지막 한 시간 가량을 드디어 말하는 자녀들과 말을 잃어가는 프랭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는 바뀌었으며, 야만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휠체어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프랭크를 요양병원 병실의 약간 열린 문을 통해 보여준다. 프랭크가 지미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지미는 침실의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프랭크는 그 문틈을 통해 어떤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프랭크는 다시 한번 살짝 열린 문을 바라본다. 관객은 프랭크가 보았던 권력자 지미 대신, 모든 이가 죽은 와중에도 과거라는 허망함을 붙잡고 죽어가는 프랭크를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그 죽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는 아니지만 성공이라 할 수는 없는 속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