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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7. 2019

2019년의 한국영화 10편

 2019년이 한국영화계에게 특별한 한 해인 것은 틀림없다. 1919년 <의리적 구토>를 통해 (물론 여기에는 반박의 여지들이 있지만) 시작된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했고,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데 이어 연말 시상식 레이스를 휩쓸고 있다. 흥행면에서는 MCU의 영화들을 비롯한 해외 영화들에게 순위를 많이 빼았겼지만, 1600만명을 동원한 <극한직업>과 1000만을 넘긴 <기생충> 등이 나름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이런 지표적인 기록들은 올해의 영화들을 이야기하는데 큰 쓸모는 없다. <기생충>의 1000만 관객은 아트하우스관마저 독식한 독과점의 힘이 컸고, 작년에 이어 많은 100억 이상 규모의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흥행 밖으로 눈을 돌리면 나름의 변화들이 눈에 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는, 이옥섭의 <메기>, 한가람의 <아워바디>, 윤가은의 <우리집> 등으로 이어지는 여성 감독들의 독립영화들이 차례로 개봉했으며,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지난 늦여름과 가을의 독립영화계일 것이다. 그 때 개봉한 모든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지켜보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다큐멘터리들도 그렇다. 수많은 정치다큐들이 개봉하는 가운데 꾸준히 자신들의 작업을 해온 감독들의 작품들을 영화제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 강유가람의 <이태원>과 같은 작품이 정식 개봉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연말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올해 본 영화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유독 한국영화의 관람편수가 적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지루한 기획영화들을 피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올해 방문한 10여개의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계속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아쉽게 느껴졌다. 특히 국제영화제의 경우, 개봉은 커녕 넷플릭스나 VOD서비스 등을 통해 소개될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언젠가 다시 틀어주겠지'라는 마음가짐으로 한국영화를 등한시한 면이 있다. 다른 이들의 '2019년의 한국영화' 리스트들을 보면서 놓친 영화들이 많다는 사실을 거듭 알게 된다. <아워 바디>, <당신의 사월>, <준하의 행성>, <남매의 여름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작은 빛>... 물론 몇몇 영화들은 내년 개봉 예정이거나, 국내영화제를 통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막연한 기대감은 정말 기약없는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다보니 '2019년의 한국영화 10편'도 놓치지 않고 챙겨 본 영화들과 아쉽게 놓친 영화들로 구성되는 것 같다. 어쨌든, 올해 관람한 여러 편의 한국영화 중 10편을 골라보았다. 순서는 가나다 순이다.



1. <강변호텔> 홍상수 2018

 홍상수는 재밌는 영화를 찍는다. 아마도 이것은 홍상수의 커리어가 끝나는 날까지 변하지 않는 명제일 것 같다. <강변호텔>은 최근 몇년간 1년에 두 편씩 영화를 제작하며 달려오던 홍상수의 근작 중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작품이다. '죽음'과 '처연함'을 다룬다는 점에서 <아이리시맨>,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포드V페라리> 등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연출한 올해의 작품들과 어딘가 유사해보이기도 한다. <강변호텔>은 강변에 있는 호텔에 홀로 묵던 시인이 두 아들을 그곳으로 부르고, 마침 호텔에 묵던 두 여성과 시인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선 홍상수의 영화들이 이성애적 사랑을 영화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면, <강변호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성 간의 사랑'이라기 보단 가족애나 여성 간의 사랑에 가깝다. 같은 사랑을 테마로 하지만, <강변호텔>의 방향이 앞선 작품들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처음으로 홍상수의 영화에 죽음이 담겼다. 게다가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고 핸드헬드로 촬영된 쇼트들이 홍상수의 영화에 (아마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영화에서 시인은 계속 아름다움, 사랑에서 멀어질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의 반대편, 마치 사후세계인 것처럼 등장하는 눈 덮인 아름다운 강변의 건너편에는 죽음이 위치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쇼트는 영화의 시작부터 죽음의 징후를 드러내고, 시인은 아름다운 것에서 벗어나 그것으로 돌진한다. 사랑을 향해 돌진하다 자가당착적인 미로에 빠져버린 전작들의 주인공과 <강변호텔>의 시인은 다르다. 홍상수의 신작은 항상 전작과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며 즐거움을 주었다. <강변호텔>은 그의 근작 중 그 차이를 가장 극적으로 벌린 사례가 아닐까 싶다.

2. <미성년> 김윤석 2018

 배우 김윤석이 영화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흥미로운 영화일지언정 재밌고 즐거우며 좋은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감독 김윤석의 데뷔작 <미성년>은 그려한 우려를 손쉽게 날려버린다. <추격자>를 통해 이름을 알린 그가 출연해온 여러편의 '남자 영화'가 그의 연출 데뷔작이 될 것이라는 추측도 이 영화의 캐스팅이 발표되자 사라졌으며, 개봉 이후 수많은 여성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미성년>은 불륜을 저지른 (김윤석 본인이 연기하는) 지질한 남성 외에 별다른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불륜 자체 대신 불륜이라는 사건을 통해 변해가는 두 미성년을 다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해준과 박세진, 두 신인이 연기한 두 캐릭터는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사건을 맞이하고 변화한다. 두 사람의 엄마들은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분노와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김윤석이 코믹하면서도 진중하고, 섬세하며 차분한 연출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라는 예측은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올해의 배우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정은, 염혜란, 이상희, 김혜윤, 정이랑 등의 배우들을 적재적소에서 단역으로 활용하며 영화의 리듬을 조율하는 연출은 배우들을 활용하는 방법에 어느 정도 통찰력이 있는, 배우 출신 감독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의 숏들을 가져와 간단하게 재사용하는 장면들이나 조금은 애매한 엔딩이 아쉽지만, 이정도면 올해의 깜짝 데뷔라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

3. <벌새> 김보라 2018

 <리코더 시험> 등의 단편영화로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린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단연코 올해의 데뷔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1994년을 살아낸 중학생의 시점으로 그 시대를 담아내는 이 작품은 학벌, 가부장적 가정, 세월호 참사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안전불감증 및 불안정한 상태, 학생운동, 재건축 등 수많은 한국의 사회문제들을 자연스럽게 경유한다. 붕괴의 징후를 시도때도 없이 내비치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중학생 은희는 한문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통해 변화한다. <벌새>에서 영지는 한번도 스스로 누군가와의 단절을 주도하지 않는다. 은희가 겪는 관계의 단절들은 상대방에 의해서이거나, 갑작스런 재난에 의해 발생한다.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은희가 집을 잘못 찾아가 간절하게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들기는 오프닝 시퀀스는 그러한 단절의 상황 속에 내던져진 상황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때문에 <벌새>는 부모나 학교 선생님조차 길잡이가 되어주지 못할 망정 균열이 가고 있는 길만을 제시하고 있는 잘못된 길잡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우연히 만나 길을 알려주는 대신 어떤 길이든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 분열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대신,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4. <암전> 김진원 2018

 <곤지암> 이후 흥행작은 커녕, 관객들을 만족시킬만한 호러영화 마저 좀처럼 등장하지 않던 와중에 <암전>이 개봉했다. <암전>은 <도살자>라는 슬래셔 영화를 연출했던 김진원 감독의 10년만의 신작이다. <도살자>를 통해 한국영화로는 예외적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금지구역 섹션에 초청되기도 했던 김진원 감독은 <암전>을 통해 호러영화에 대한 집착과 애정을 동시에 드러낸다. 영화는 호러영화 각본을 쓰던 영화감독이 우연히 상영이 금지된, 귀신 들린 영화라는 소문이 자자한 '암전'이라는 영화를 찾아 나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 영화 속 영화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이 영화는 그 구조가 가진 장점을 제대로 활용한다. 버려진 폐극장이나 부천영화제 등의 로케이션은 국내 장르영화 팬이라면 만족스러우면서도 반가운 공간들일 것이다. 게다가 영화 속 영화인 '암전'이 대학 영화과 졸업작품이라는 설정은 한국 '영화과'의 생리를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제공하기도 한다. 언제나 좋은 연기를 선보이는 진선규는 짧은 출연분량에도 김진원 감독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귀신이 만들었다는 호러영화를 찾아 나서는 감독 역할의 서예지 또한 집착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훌륭하게 선보인다. 전체적으로 존 카펜터의 <담배자국>과 같은 영화가 연상되며 전체적인 이야기도 그 작품에서 차용한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김진원 감독은 각본작업을 마친 이후에야 그 작품을 봤다고 한다는 점 또한 재밌다.

5. <야광> 임철민 2018

 임철민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야광>은 게이들의 크루징 스팟인 파고다극장, 몇몇 공원이나 지하철 역 등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영화에는 끝없이 게이 데이팅 어플인 '그라인더'의 알람음이 등장하고, 데이 포 나잇 기법 등이 영화에 사용되기도 하며, 야광처럼 보이는 빛들을 포착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비가시회되고, 들리지 않게 된 장소와 존재를 다시 끄집어내고 뭉치는 작업을 수행한다. 데이 포 나잇 기법을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야광처럼 보이는 빛들로 포착해낸 이미지들은 비가시화된 것들을 다시 끄집어내려는 시도이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밤 장면과 대화들이 데이 포 나잇과 후시녹음을 통해 구성된 것임이 폭로되는 후반부는, 빈 공간에 입혀진 소리 정도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영화가 수행하고 있는 폭로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퀴어적 방법론을 영화의 작업방식으로 채택한 야광은 데이 포 나잇이나 후시녹음,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CG 이미지처럼 가상에 속한 것들이, 마치 영화 내내 들려오는 그라인더 알림음처럼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려 할 때 발생하는 빛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6. <언더그라운드> 김정근 2019

 <그림자들의 섬>을 통해 한진중공업 조선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아냈던 김정근 감독은 신작 <언더그라운드>는 부산지하철의 노동자들을 담아낸다. 이 작품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특정 시기나, 특정 분야의 노동자들만을 담아내는데 집중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지하철을 분해, 관리 및 수리하는 노동자들, 지하쳘 역사를 청소하는 청소노동자들, 지하철이 다니는 터널을 관리하는 노동자들, 지하철과 기차역의 역무원들, 열차의 기관사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가 되길 바라며 면접을 준비하는 공업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등을 비추고 있다. 전작이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언더그라운드>는 이미 투쟁의 과정을 겪은 노동자나, 현재 혹은 미래의 노동자를 비추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동시에 영화는 <히든 시티>처럼 지하의 터널들을 탐구한 영화들의 SF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경계하고 있다. 지하철 창문이나 플랫폼에서 살짝 보이는 어두운 터널의 입구를 제외하면, 그곳에서 노동하는 노동자가 아니고서야 좀처럼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공간은 김정근 감독의 카메라에선 철저히 노동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물론 지하공간과 거대한 기계들이 작동하는 순간이 자연스레 만들어내는 SF적 분위기를 완전히 몰아내진 못하지만, 관객들이 상상으로만 접할 수 있던 공간을 온전한 노동의 공간으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작품이다.

7. <엑시트> 이상근 2019

 100억 이상의 예산이 투입된 올해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중 가장 기억할만한 작품은 아무래도 <엑시트>가 아닐까?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칠순잔치) 속에서 갑자기 찾아온 재난상황을 벗어나려는 두 주인공의 노력을 담은 이 작품은 한국에서의 재난영화를 이야기할 때 앞으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수작이다. 테러를 통해 시작된 영화의 재난을 알리는 재난문자부터, 스마트폰과 유투버를 사용하는 방식까지, 지금 당장 재난이 벌어진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은 상황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다. 또한 재난에 의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는 연출이라던가, 재난의 스펙터클보단 탈출에 초점을 맞춘 스펙터클, 암벽등반이라는 소재를 한국의 건축물을 통해 활용하는 방식 등 블록버스터 연출에서의 윤리와 효과적인 스펙터클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장면들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한 장면에서 감독의 치열한 고민과 그에 걸맞는 결과물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특히 기억할만한 것은 재난보다 한발 늦게 찾아오는 재난문자와 그럼에도 재난문자나 뉴스만을 믿는 기성세대 인물들, 그리고 두 주인공이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땅바닥에 놓인 핸드폰들만이 울리는 장면이다. 이제 재난영화에 재난문자가 등장하는 장면은 일종의 클리셰로 자리잡고 있지만, <엑시트>는 그것을 단순히 재난의 시작으로 설정하는 대신 재난의 과정으로 설정하고 있다. <엑시트>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재난의 상황에 놓인 지금 여기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할 수 있는가?

8. <우리는 매일매일> 강유가람 2019

 올해 <이태원>을 정식개봉시키며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강유가람의 신작 <우리는 매일매일>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주도하는 영영페미니스트(Yuong Young Feminist) 혹은 넷페미니스트(Net Feminist) 이전에 활동하던 영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들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활동하던 페미니스트들이 그 주인공이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각자의 활동을 하던 이들은 각자의 지역과 직업과 자리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 때 그 페미니스트 여러분, 모두 잘 살고 있습니까?"라는 짧은 시놉시스는 영화의 주제를 짧고 명확하게 요약한다. <우리는 매일매일>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짧은 기록영화이자, 이들의 현재를 보여주며 지금 여기의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함을 상기시키고,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운동가들의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그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9. <윤희에게> 임대형 2019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통해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치른 임대형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 <윤희에게>는 한국 퀴어영화 걸작선 같은 리스트에 꼭 올려야 할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의 편지를 받고, 딸 새봄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첫사랑과 재회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는 가부장제와 동성애혐오증을 통해 억압받던 한 여성이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전작에서 한 개인을 (죽음까지 포함해)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임대형 감독은, <윤희에게>에서 꺼낼 수 없던 과거를 긍정함과 동시에 그 이후마저 긍정하게 하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한국과 일본 오타루를 오가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야기되지 못하던 과거를 불러내어 오타루의 아름다운 풍광 한가운데에 세운다. 

10. <82년생 김지영> 김도영 2019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김도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82년생 김지영>은 영화화하기 까다로운 소설을 영화화함에 있어 하나의 모범사례로 꼽힐만 하다. 소설과는 다르게 얼굴을 얻고 익명성을 벗은 김지영은 스크린 속에서 살아 있고, 스크린 앞에 앉은 여성들은 자신과 유사한 이가 스크린 속에서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김지영뿐만 아니라 지영의 엄마 미숙, 지영의 언니 은영, 지영의 직장상사 김팀장, 지영의 직장동료 혜수, 지영의 외할머니 등 또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여성의 공간을 집 안으로 한정 짓는 구조 속에서 각자의 투쟁을 벌이고 있음이 러닝타임 내내 드러난다. 김지영이 이들의 모습으로 빙의되는 것은 스크린 안팎에 존재하는 익명의 보편 여성들에게 얼굴을 부여하는 것이다. 영화 자체는 형식적으로 관객들이 지영에게 깊게 몰입하는 대신 소설과 같이 그를 관찰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지만, 몰입이 강요되지 않음에도 관객들은 지영에게 공감하고 몰입한다. 물론 빙의된 지영과 지영의 엄마가 대면하는 장면은 명백히 신파적인 장면이며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 테크닉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영화 안팎으로 쌓인 맥락들 사이에서 지워지던 여성의 얼굴이 익명성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또한 김지영을 폐쇄적인 가부장제의 억압의 순환으로 빠지게 하는 대신,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는 엔딩은 ‘여자’라는 익명으로 은폐되던 여성들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로 시작되는 관찰의 기록에서 “김지영은 1982년 4월 1일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자전적인 서술로의 변화, 그 변화를 담아냈다는 점이 <82년생 김지영>이 2019년에 영화로 제작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밖에 언급하고 싶은 작품들

<증발> 김성민 2019

<기묘한 가족> 이민재 2018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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