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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3. 2019

2019년의 해외영화 10편

 2019년도 끝나간다. 올해도 극장 개봉작, 넷플릭스 등의 스트리밍 사이트 공개작, 영화제 상영작 등 다양한 영화들을 보러 바쁘게 극장과 온라인을 오갔다. 매년 드는 생각이지만, 한 해 동안 공개되는 영화들 중 관심있는 모든 작품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국내에서 상영되지 않았기에 관람 자체가 불가능한 몇몇 영화들, 가령 로버트 에거스의 <등대>나 샤프디 형제의 <언컷 잼스>, 알마 하르엘의 <허니 보이> 등은 당연하게도 올해의 영화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러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극장에서 놓친 영화들이 여럿 있다. 특히 영화제에서 짧게 상영된 뒤 국내의 영화유통 경로를 통해서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들, 가령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알렉스 홈즈의 <첫항해>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매년 연말결산 리스트 같은 것을 작성하는 동안 떠오르는 영화들은 대부분 관람하지 못한, 언제 한국에서 또 상영할지 알 수 없는, 그리고 언제 국내에 소개될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이다. 국내영화라면 개봉이나 각종 공동체상영, 국내영화제 등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가질 수 있으나, 해외영화들은 정말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이 리스트는 다행히도 정식 개봉, VOD 공개, 영화제, 넷플릭스 등을 통해 다행히도 보게 된 여러 편의 영화들 중에서 고른 리스트이다. 동시에 내가 놓친 수많은 영화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리스트이기도 하다. 이 글을 보게 될 사람들도 이 글에 소개된 영화들 중 자신이 놓친 영화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리스트는 누군가가 놓친 영화들을 소개하기 위한 리스트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10편의 영화와 10편 안에 꼽기는 애매하지만 함께 언급하고 싶은 영화들을 골랐다. 리스트는 가나다 순으로 되어 있다.

1.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 노아 바움백 2019

 노아 바움백과 넷플릭스의 두번째 협업인 <결혼 이야기>는 놀라운 작품이다. 여기서 놀랍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니콜과 찰리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놀라웠다거나, 각본이 훌륭하다거나, 35mm 필름으로 촬영된 화면이 끝내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이것들도 놀라웠지만, <결혼 이야기>는 노아 바움백의 최근작들을 돌아볼 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놀라운 영화이다. <그린버그>와 <프랜시스 하>로 시작해 넷플릭스와 함께한 전작 <마이어로위츠 이야기>까지 그의 2010년대 필모그래피는 가족이나 친구 집단이 형성되고 분열되는 과정을 코미디 장르 안에서 보여주었다면, <결혼 이야기>는 분열 자체가 영화의 테마로 작동한다. '이혼'이 아니라 '결혼'이 영화의 제목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분열할 때가 되어야 우리가 묶여 있던 관계들을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다.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행복할 때에는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영화의 주인공인 니콜과 찰리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분열의 양상, 가령 롱테이크로 제시되는 니콜의 '결혼 이야기'와 수없이 나뉘는 쇼트들로 구성된 찰리의 '결혼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보여주는 흥미로움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분열이 예고된, 그리고 그 분열을 매끄럽게 진행시키거나 봉합하는 대신 마구 헤집어대는 결혼 및 이혼제도의 성질을 폭로함과 동시에 그것의 긴장감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니콜과 찰리가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벽에 물리적인 균열을 냄으로써 마무리된다는 점은 <결혼 이야기>를 요약하는 핵심이다.

2. <그녀들을 도와줘> (Support The Girls) 앤드류 부잘스키 2018

 <그녀들을 도와줘>는 스포츠바 '더블 웨미'의 매니저 리사와 직원들의 이야기이다. 후터스 등의 프랜차이즈로 널리 알려진 스포츠바는 북미에서 성행하는 일종의 패밀리 레스토랑이며, 미식축구나 야구 등 각종 스포츠 경기를 큰 TV나 스크린에 상영함과 동시에 젊은 여성들을 고용하여 노출이 심한 유니폼을 입히고 서빙을 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더블 웨미'는 미국의 한 지역에서 운영되는 스포츠바이다. 매니저인 리사는 많지 않은 급여와 경제적 어려움에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함께 일하는 여성 직원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성상품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서로를 도와주는 이들의 이야기가 <그녀들을 도와줘>의 표면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그것을 통한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사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손님들을 끌어모을수록 스포츠바에서 진행되는 성상품화는 더욱 견고히 유지될 뿐이다. 리사는 한 직원이 부상당하자 그의 병원비를 모금하는 행사를 연다. 모금행사의 모금 방법은 젊고 헐벗은 여성들이 세차 서비스를 해주고 팁을 받는 형식이다. 이들은 모순 속에서 형성된 연대를 통해 어떤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버는 돈은 결국 백인 남성 사장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가고, 고용이 불안정한 일터를 바탕으로 형성된 연대는 언제든지 분열될 준비를 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이틀동안 벌어진 이런저런 사건들 이후 함께 퇴직한 리사와 직원들은 대형 프랜차이즈 스포츠바의 면접장에서 조우한다. 이들은 열악한 일자리의 폐쇄적인 순환 속에 갖혀 있으며, 이들 사이의 연대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닌 당장의 일자리와 경제적 생존과 결부된다. <그녀들을 도와줘>는 이렇게 분열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 연대, 그럼에도 이들은 왜 연대하는지에 대한 조건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3. <그녀의 냄새> (Her Smell) 알렉스 로스 페리 2018

 베키 썸씽은 전설적인 여성 삼인조 락밴드 '썸씽 쉬'의 보컬이자, 퇴물의 길로 향하고 있는 락스타이다. 자기파괴적인 성격의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먼저 찾아오지 않는 음반사와 공연기획자 사이에서 고군분투해야 하고, 엄마로써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으며, 자신보다 오래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과거의 동료를 시셈하고, 자신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신인밴드와 만나기도 한다. 알렉스 로스 페리는 그 과정을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박살났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는 베키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카메라는 관객들이 베키의 매니저 혹은 밴드의 맴버와 같은 위치에서 그를 바라보게 한다. 락스타의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삶을 그린 영화는 많았지만, <그녀의 냄새>처럼 집요한 영화는 많지 않다. 이 영화가 포착하는 베키의 삶은 분열과 파괴 그 자체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등장하는 봉합의 순간은 단지 찰나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녀의 냄새>는 수많은 것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떨어져나가고, 자신 마저 파괴되는 어떤 삶에 대한 에세이와도 같다. 골절된 뒤 더욱 단단하게 붙는 뼈처럼 살아가는 어떤 삶의 포착인 셈이다. 

4. <꿈의 안데스> (La Cordillère des songes) 파트리시오 구즈먼 2019

 <칠레 전투> 3부작을 연출했던 파트리시오 구즈먼은 당시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고 46년의 시간 동안 칠레에 대한 영화를 20여편 연출했다. <꿈의 안데스> 또한 칠레에 대한 작품이다. 파트리시오 구즈먼은 안데스 산맥, 그 중에서도 자신의 고향인 칠레 산티아고의 코르디예라를 다시 떠올린다. 제목에 '꿈'이 들어가는 것은 구즈먼이 영화내내 자신의 유년기를 추억하고, 안데스-코르디예라라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이상향을 공유하는 화가, 조각가,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 등을 인터뷰하며, 자신이 꿈꾸던 유년기와 칠레의 이상향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그가 이 소망을 말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마치 안데스 산맥의 돌들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조금은 비논리적인 구성으로 독재정권의 폭력과 그 영향으로 인해 칠레인의 본성과 멀어져버린 현재의 칠레를 보여주는 것이다. 안데스 산과 산티아고 도시의 풍광을 드론으로 촬영한 장면과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인 진압 장면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된다거나, 피노체트 정권이 사용하던 건물에 들어간 구즈먼이 "유령들이 있다"고 언급하는 장면 등은 일관된 맥락이 없이 제시된다. 그러나 구즈먼이 소망하는 것, 그가 바라는 칠레의 모습, 그러기 위해 소환되는 역사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안데스 산맥의 돌들이 이를 기억하기를 소원한다는 점에서, 구즈먼은 꿈이라는 소재를 매개로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쓰기를 시도한다.

5. <비탈리나 바렐라> (Vitalina Varela) 페드로 코스타 2019

  올해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페드로 코스타의 신작 <비탈리나 바렐라>는 그의 영화에 줄곧 출연해온 배우 비탈리나 바렐라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비탈리나의 남편이 죽자, 비탈리나가 40여년 만에 포르투갈로 돌아와 벌어지는 일이라고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장례행렬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페드로 코스타는 빛과 어둠을 활용한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계속 보여준다. 그의 영화들이 언제나 그랬지만, 인물들이 끊임없이 방황함에도 이들이 돌아다니는 동선은 절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비탈리나 바렐라>의 배경 또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빈민가인데, 거의 모든 장면에서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 실내와 실외가 구분되지 않는다. 거기에 인물들의 동선마저 파악되지 않고, 그저 어둠과 빛 사이에서의 등-퇴장을 반복할 뿐이니 비탈리나와 벤투라를 비롯한 인물들이 사후세계에 속해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은 언뜻 사후세계와 (이승은 아니지만) 사후세계는 아닌 곳을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탈리나가 그러한 시간을 거쳐 빛으로 나올 때의 쾌감 내지는 해방감이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비탈리나가 도달한 빛의 공간이 장례식이 진행중인 공동묘지라는 점과, 사후세계도, 사후세계가 아닌 곳도 아닌 온전히 이승으로 인식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간 코스타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의 '방황'을 마무리 짓는 여성 캐릭터 비탈리나 바렐라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존재한다.

6.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마틴 스코세이지 2019

 2010년대 들어 갱스터 영화와는 조금 거리를 둔 영화들, 가령 <휴고>나 <사일런스>와 같은 작품들을 연출해오던 마틴 스코세이지가 다시금 갱스터 영화로 돌아왔다. 209분이라는 압도적인 러닝타임은 스코세이지가 그 동안 쌓아온 '수컷들의 세계'에 마침내 사망선고를 내리는 시간이자,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시네마'에 자신을 투신했던 그가 '시네마의 죽음'을 알리는 시간이다. 디에이징 기술을 통해 50년에 가까운 타임라인을 로버트 드 니로, 조 페시, 알 파치노가 직접 소화하게 한 이 작품은 기술을 통해서도 감출 수 없는 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작품은 과거를 추억하는 작품이 아닌, 퇴적된 과거의 무게를 감당하는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처연하게 각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작품으로 완성됐다. 프랭크 시런, 지미 호파, 러셀 버팔리노라는 세 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전반부 2시간 가량과, 이들이 각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후반부의 느릿한 리듬의 간극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프랭크의 내레이션을 통해 거대한 시간으로 묶인다. 각기 전개되는 세 개의 타임라인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은 죽어가는 시간 자체를 담아낸다. 각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자막을 통해 가해지는 사망선고는 이들이 각자 맞이하는 예정된 죽음을 처연하고 침착하며 집요하게, 그리고 매우 당연한 일임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보여준다. <아이리시맨>이 스코세이지의 마지막 영화는 아니겠지만, 그가 달려왔던 과거의 죽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마치 그의 유작과도 같은 처연함을 담고 있다.

7. <언더 더 실버레이크> (Under The Silverlake) 데이빗 로버트 미첼 2018

 <팔로우>로 장르영화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데이빗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서사구조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독창성만 놓고 본다면 2019년 한해 동안 국내에 소개된 작품 중 가장 새로운 작품일 것이다. 데이빗 린치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선셋대로>를 비롯한 20세기 할리우드 영화와 대중문화를 혼란스럽게 유희했다면,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이 영화를 통해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유사한 혼란함을 가져와 80~90년대에 취향과 생각이 묶여 있는 Z제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Z세대, 즉 90년대 중후반부터 21세기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복고열풍과 함께 몰아쳐 온 무차별적인 과거의 귀환, 끝없는 리메이크와 속편의 시대, 샘플링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 세대를 정의할 문화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운 시점의 세대는 앞의 세대가 이미 만들어 둔 것들을 무기력하게 반복하고 재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주인공 샘은 마을에 나타난 '개 도살자'와 갑자기 사라진 이웃집 여자를 추적하기 위해 온갖 영화, 대중음악, 코믹스 등에 숨겨진 퍼즐들을 풀어 나간다. 당장 집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날 위기이지만, 그는 그런 것을 그다지 상관하지도 않는다. 그는 무기력하게 앞선 세대간 남긴, 완성될 수 있는지도 모를 퍼즐 조각들을 남은 힘을 다해 찾아 나선다. 예수와 자신을 연관짓는 인디밴드, 모든 히트곡을 자신이 작곡했다 주장하는 거물 작곡가, 내세나 영생을 믿으며 지하 벙커에 스스로를 감금하는 백만장자들... 샘이 찾은 것은 진실도, 진실로 짜맞출 수 있는 퍼즐조각도 아닌 어처구니 없는 과거와 대중문화의 파편들이다. 139분의 러닝타임, 일주일 가량의 영화 속 시간, 20여년 가량의 샘의 인생은 연결되지 않는 조각들을 헤집은 끝에 도달한 무의미와도 같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그 무의미한 혼란스러움 속으로 인물을 내던지고 관찰한다.

8. <지워진 자들의 흔적> (Tirss, rihlat alsoo'oud ila almar'i) 갓산 할외니 2018

 갓산 할와니 감독은 지워진 자들의 ‘흔적’이라는, 레바논에서 자행된 학살로 인해 실종된 이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지표를 탐구한다. 이들의 흔적은 벽에 붙은 사진, 기술적으로 지워진 사진, 주민등록부 등에 남아 있으며, 벽에 덕지덕지 붙어 아예 벽이 되어버린 포스터들을 긁어내거나 주민등록부 등의 공문서를 뒤지고, 기술적으로 지워진 사진에 남은 기술의 흔적 등을 찾는 과정이 영화에 담긴다. <지워잔 자들의 흔적>은 이 지표들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은 영화 안에서만 볼 수 있다”는 자막을 통해 영화 전체가 흔적-지표로 작용하는 탁월한 전략을 통해 학살의 희생자들을 기억한다. 벽에 붙은 포스터들을 긁어내어 지워진 자들의 얼굴을 '발굴'해내고, 그것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이미지와 시간을 통해 저항하는 것이다. 흔적을 발굴하고, 얼굴에 시간을 부여하는 영화의 시간, 실종자들의 가족은 사망 후에 주민등록부에서 삭제되지만 실종자들은 ‘실종’ 상태이기 때문에 거의 영원히 서류에 존재할 것이라는 마지막의 이야기는 지울 수 없는 지표들의 시간을 보여준다. 

9. <진실과 거짓 사이> (Port Authority) 다니엘 레소비츠 2019

 이복 누나를 만나기 위해 피츠버그에서 뉴욕까지 온 폴은 결국 누나를 만나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건달들에게 폭행당하던 폴을 구해준 리는 그를 자신이 운영진으로 있는 노숙자 쉼터에 데려간다. 폴은 리와 함께 퇴거명령을 집행하는, 일종의 용역깡패와 같은 일을 반강제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중 같은 쉼터에 있던 티제이를 몰래 따라가다가, 우연히 퀴어들이 보깅 댄스를 경연하는 볼룸에 오게 된다. 퀴어가 아닌 그는 이내 그곳에서 쫒겨나지만,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와이와 대화를 나누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폴은 와이가 트랜스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둘의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지만, 영화가 다루는 '진실'과 '거짓'은 와이의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폴은 호모포빅하며 비백인 이민자들을 내쫓는 일을 하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지만, 와이에게는 이 사실을 숨긴다. 동시에 쉼터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퀴어들과 어울린다는 사실도 말하지 못한다. 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영화는 자신의 성적지향, 성정체성을 '클로짓'으로 남겨둔 모든 이들이 경험했을 이야기이다. 우리는 왜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까? 혐오는 왜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만 상대를 판단하는 것에서 시작할까? 무엇인가를 숨길 수밖에 없는 혐오사회에서 우리는 누구와 진실을 나눌 것인가? <진실과 거짓 사이>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함께 고민할 것을 제안하는 작품이며, 그 안에서도 유머와 역동감을 잃지 않는 수작이다.

1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셀린 시아마 2019

 화가인 마리안은 어느 여성의 초상화를 그릴 것을 요청받는다. 마리안이 그릴 대상은 엘로이즈. 언니가 죽은 이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던 엘로이즈는 마리안과 함께 산책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둘은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레즈비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 온 셀린 시아마의 신작이자,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계급을 뛰어 넘는 레즈비언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캐롤>이나 <아가씨>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화가'라는 설정을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한다. 화면을 꽉 채우는 캔버스에 목탄이나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마리안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는 점차 쌓아올려져 가는 감정에 따라 뚜렷하고 과감해지며, 그림에서 시작해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하기도 한다. 이들의 감정선을 따라 변화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라던가, 비발디의 "여름 3악장"을 활용한 장면, '불'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만들어낸 장면들이 발휘하는 힘은 그저 압도적이기만 하다. 특히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를 차용한 장면이나,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차용한 장면은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를 알려준다.


+그 밖에 언급하고 싶은 작품들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 (Dolemite Is My Name) 크레이그 브루어 2019

<델핀과 캐롤> (Delphine & Carole) 칼리스토 맥널티 2019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Varda par Agnès) 아녜스 바르다 2019

<잔 다르크> (Jeanne) 브루노 뒤몽 2019

<포드V페라리> (Ford V Ferarri) 제임스 맨골드 2019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알리체 로르와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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