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 마지막 극장관람작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이마 베프>. 영자원 특별상영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하는 영화감독은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리메이크할 것을 제안 받고, 홍콩 배우 장만옥을 주인공인 '이마 베프'로 캐스팅해 영화를 제작하려 한다는 것이 내용이다. 초기 프랑스영화는 물론, 초기 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루이 푀이야드의 작품을 리메이크 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누벨바그 최고의 뮤즈 중 한명인 장 피에르 레오를 영화감독으로 출연시키고, 그와 그의 동료 감독들을 얼추 누벨바그~68혁명 이후 시기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들로 설정한 이 영화는 작가주의가 쇠락해가고 상업영화 중심으로 영화산업이 재편되는 9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반영이다. 사실 이 문장은 프랑스를 (미국을 제외한다면) 영화산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다른 국가로 바꿔도 성립할 것이다. 아사야스는 그만큼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마 베프>의 흥미로움은 장 피에르 레오와 장만옥이라는 독특한 캐스팅에서 출발한다. 누벨바그의 몸은 불가능에 가까운 리메이크 제안을 수락하고, 자신이 촬영한 영화의 가편집본을 보고 분노하며, 신경쇠락에 빠져 영화를 내팽개쳐버린다. 그런 감독의 제안을 받아 프랑스까지 날아온 홍콩의 액션 스타 장만옥은 최선을 다해 영화촬단영에 임하고, 극 중 도둑인 캐릭터에 몰입해 호텔에서 누군가의 목걸이를 훔치기도 한다. 감독은 두기봉의 <동방삼협>을 보고 장만옥을 캐스팅했다고 한다. 장만옥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우아한 액션을 선보이는 것에 매료됐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장만옥은 스턴트 대역을 통해 촬영된 장면이라 설명하지만, 감독은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68혁명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감독은 영화의 환영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촛불을 흔드는 배우의 미세한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화를 내던 그는 '이마 베프'가 파리의 건물 옥상들을 넘나드는 스턴트 장면을 촬영하는 날에 사라져버린다. 영화가 환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역을 등장시키는 그 순간에 자취를 감춘 그는 요양하며 안정을 찾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촬영된 필름에 손톱으로 스크래치를내고 기하학적인 원과 직사각형을 잔뜩 그려 넣은 괴상한 편집본이다.
2-1. 집에서 <윤희에게>를 다시 봤다. 때마침 친구가 빌려준 한정현의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를 읽으며 <윤희에게>를 떠올리던 참이었다. 두 작품을 연관시킨 이유는 단순히 [줄리아나 도쿄]의 배경 중 한 곳으로 오타루가 나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외국어증후군' 때문에 한국어를 잃어버린 한주와, 게이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곳으로 오고 싶었다던 유키노, 도쿄의 한 서점에서 일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유로 동거를 시작한다. 한국인 헤테로 여성과 일본인 게이 남성의 독특한 동거. 그러던 중 유키노가 실종되고, 그로부터 1년 쯤 지난 시점에서 유키노가 발견됐다는 연락이 한주에게 옴으로써 소설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유키노의 어머니나 김추라는 한국-일본 혼혈인의 이야기까지, 소설은 네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바쁘게 오간다. 과거를 회상하는 한주, 상담사와 이야기하며 자신과 어머니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유키노, 학회에서 발표하기 직전 과거를 떠올리는 김추. 이들의 현재는 과거의 반영이자, 지리적인 문제와 정체성이 뒤섞인 디아스포라적 인물들이다. 이는 서울에서 도쿄로, 오키나와에서 도쿄, 오타루로, 오타루에서, 도쿄, 부산으로 향한 이들의 행적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행적은 지역의 문제보단 과거와 기억의 문제와 결부된다. 데이트폭력, 미군기지, 줄리아나 도쿄 클럽, 한국의 학생운동 등이 이들의 과거와 결부된다. 전공투와 줄리아나 도쿄를 연결지으려는 김추의 논문은 이러한 배경들을 바탕으로 한다. 쉽사리 엮이지 않을만한 소재들을 엮어가는, 그것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행적을 추적하는 이야기. 네 사람을 관통하는 '정추'라는 이름은 카자흐스탄으로 망명한 북한의 작곡가이다. 이들의 과거와 현재에 각인된 그 이름은 이들의 삶을 엮어낸다.
2-2. <윤희에게>는 윤희와 쥰이 각각 드러내지 못하던 과거를 현재에서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줄리아나 도쿄]가 유려한 방식의 플래시백을 촘촘히 수놓으며 인물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윤희에게>는 직접적으로 발화되지 않는 말들, 잘못 전해지거나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각자의 목소리로 읽어내리는 편지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한국의 예산과 일본의 오타루를 오가는 여정 속에서 두 사람이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 과거가 현재 위에 쌓아올려진다. 인호와의 결혼과 이혼, 가고싶던 대학에도 가지 못했으며 비정규직인 일자리가 숨통을 죄여오던 윤희.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뒤 오타루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수의사이지만 커밍아웃은 커녕 결혼 맞선을 보라는 사촌의 짜증나는 제안만을 받고,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여성에게 화답하는 대신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라고 강력하게 충고하는 쥰. 이들의 디아스포라는 [줄리아나 도쿄]의 인물들과 같다. (지리적인 이주가 포함된) 과거로부터의 이주. 정착하지 못하고 흩어지는 삶. 윤희는 마침내 어떤 삶에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유키노와 한주는 각자 정착할 수 있는 서로를 (재)발견한다. 김추는 마침내 부모님의 과거를 알아내고 쌓인 의문들을 해소한다. 이들의 과거는 많은 곳을 옮겨다닌 끝에 현재에 정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