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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4. 2020

2020-01-13

1. 2박 3일의 광주여행 중 광주극장을 찾았다. 광주극장은 1935년 개관 이래 현재까지 운영중인 국내 최고(最古) 단관극장이며, 2002년 영진위 '예술영화전용상영관' 사업에 지원하며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의 정체성을 지닌 채 유지되고 있다. 전남의 로컬 사회학자이자 영화학자인 위경혜가 쓴 『광주극장』은 광주극장의 역사와 의의를 훑는 작은 책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최선진의 자금으로 설립된 광주극장은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니며, 극장이 설립된 1935년은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단순히 '무빙-이미지'만을 보러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닌, 활동사진과 함께 소리를 들으러 극장을 찾는 경험은 곧 근대성의 체험이었다. 국내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에서 시속 30km가 채 되지 못하는 느린 기차를 보며 근대성을 느끼던 체험이, 광주에서는 광주극장의 영화상영을 통해 전개되었다. 한국 영화 및 극장의 역사는 한국 근대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이승만-박정희 독재 시기를 거치며 제작된 '문화영화'나 <팔도강산> 시리즈와 같은 국가주도 홍보영화는 독재를 통한 산업화와 경제성장, 항공촬영이나 기차 등의 근대적 기계들을 통해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홍보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의 3S 정책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광주극장의 역사 또한 그러한 역사를 반영한다. 영화상영 뿐 아니라 연극이나 콘서트 등이 열리기도 했던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연극운동의 주된 공간 중 하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 당시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웅변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당시엔 독재정권에 의한 근대성의 홍보 수단인 영화들과 함께,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기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위경혜는 신상옥의 <성춘향>과 홍성기의 <춘향전>이 격돌한 1961년을 예시로 꼽는다. 그 명보극장이나 단성사 등 서울의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광주극장 또한 새로운 기술로 촬영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새로운 영사장비를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이것은 미국과의 동시대성을 경험하려는 열망에 의한 흥행으로 이어진다. 90년대 들어 국내 곳곳에서 시네마테크 운동이 시작되고, 80년대 중후반 시작된 대학 영화동아리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2002년 에술영화전용관으로 정체성을 전환한 광주극장은 이 흐름을 따른다. 2018년 광주독립영화관과 아시아국립문화전당의 시네마테크가 설립되며 지역 내 파트너가 함께하게 되었지만, 2002년 당시만해도 광주극장이 지역 내 유일한 시네마테크였던 셈이다. 현재도 국내 각 지역의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전용관을 순회하는 영화제가 광주극장에서 열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네마테크라는 정체성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 근대성 체험의 공간에서 시네마테크까지 이르는 경험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극장 곳곳에 옛날 상업영화 포스터와 함께 장 뤽 고다르, 아키 카우리스마키,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포스터가 뒤섞여 걸려 있는 것은 상업영화관에서 시네마테크로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풍경이며, <미워도 다시 한번>(196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같은 고전 한국영화와 최근 개봉작인 <윤희에게>(2019) 등의 포스터, 그리고 비디오 대여점의 소장 비디오들을 전시하고 있는 2층의 복도 한켠은 영화를 통한 한국 근대사의 풍경이다. <우묵배미의 사랑>(1990)과 <플래툰>(1986)부터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 이르는 영화 포스터들이 그려진 개관83주년 광주극장영화제 간판 그림은 광주극장의 복잡한 정체성과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2.

"광주좌가 문을 연 1917년 지역 치초로 전기를 도입한 광주전등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전기의 출현은 대규모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공장 설립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영화를 소비할 수 있는 대규모 관객의 도래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광주좌의 주인 후지가와 다다요시는 관객 정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총건평 120평 규모의 목조 2층 건물을 지었다"

-『광주극장』41쪽

*'좌'나 '관'은 일본의 공연장을 의미하는 용어. 1935년 개관 당시 광주극장은 '극장'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일본인 공연장과는 다른 정체성을 내세워 조선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혼종의 공간으로서 제국관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리랑 후편>(이구영, 1930)의 상영 도중 발생한 화재 사건 때문이다. 1930년 3월 26일 700여명의 관객이 <아리랑 후편>을 관람하던 도중 이웃집에서 발생한 화재를 영사실 화재로 착각하면서 극장 밖으로 대피한 것이 중외일보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대 흥행작 <아리랑>(나운규, 1926)의 후속편이자 조선 최고의 스타 나운규가 출연한 영화를 일본인 극장에서 상영하 것은 영화 소비 시장이 협소한 지방 도시의 극장이 혼종의 공간이었음을 말한다."

- 『광주극장』44쪽


'이양춘은 해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신문광고에 등장한다. 즉, 1950년 4월 2일부터 '불란서 명화'로 소개된 <모성의 비밀>과 5월 26일 '중국 영화'로 소개된 <탈옥인의 정체> 광고에도 이양춘의 '해설'은 강조된다. 하지만 '설명'과 '해설'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변사는 연행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낯선 문물을 소개하는 보조자의 역할에 한정된다. 영화를 이해하고 독해하는 데 관객의 몫이 커지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차츰 집단으로서 '관객(audience)'에서 영화 텍스트와 교류하는 '관객(spectator)'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광주극장』86쪽

*이양춘은 일제강점기부터 변사로 활약하던 인물


"모든 극장은 각기 영사기 2대와 발전기 1대를 비치하여 상영 환경의 안정성을 기했다. 신설 극장은 대부분 광주의 중심 동구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극장 공간에 불어온 '근대화의 바람'은 극장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 영화 상영장의 증가는 상설 극장에 한정되지 않았다. 관개깅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영화 자동차'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 국가는 광주를 포함한 전남의 각 시군에 영화 상영을 위한 지프차를 한대씩 배치하기 위하여 관련 예산을 편성했다. 이는 영화를 통한 '문화 향상'을 내세우며 '공보 행정을 더욱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대한민국은 점점 '극장 국가'로 변모해 갔다."

- 『광주극장』108쪽


"극장 밖에서도 '갈 곳'과 '볼 것' 그리고 '들을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극장의 처지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자 광주극장은 관객에게 이전과 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단평을 포함한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장내 방송으로 내보낸 것이다."

- 『광주극장』127쪽


"1980년대 초반 에로영화의 광풍이 극장을 휩쓸고 있을 무렵, 도시 광주는 이전과 다른 영화를 만날 준비를 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5.18을 다룬 독립영화를 제작한 것이다. 지역의 문화 운동 단체 '민중문화연구회'의 '사진과 영화' 분과의 실행위원인 김선출과 그의 동료들이 5.18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에 관한 8mm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서울대 영화 동아리 '얄라셩' 출신들이 결성한 '서울영화집단'에 소속된 홍기선과 배인정 등의 도움을 받은 작업이었다. 지역 문화 운동 활동가의 기억에 따라서 구술 증언이 엇갈린 부분이 존재하지만, 다큐멘터리 <박관현 열사> 제작은 이후 도래할 독립영화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 『광주극장』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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