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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조각조각 모은 것, 사랑

왕가위 감독의 걸작 <화양연화>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왕가위의 영화를 드디어 극장에서 만났다. 2013년에 나온 <일대종사>를봤다면 좋았겠지만, 그 때는 왕가위라는 감독을 잘 알지도 못했고, 중화권영화에 관심이 없는 시기였다. 올해 장국영의 영화들을 파면서 자연스럽게 왕가위 영화세계에도 빠져들었고, 학교 과제로 만났던 <중경삼림>부터 <아비정전>,<동사서독 리덕스> 등을 차례로 관람했다. 화려한미술과 그의 인장이 느껴지는 촬영을 극장에서 접하지 못한 것이 계속 아쉬웠는데, 아트나인에서 <화양연화> 특별상영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식간에 매진돼버려 못 가나 싶었는데 운 좋게 Prismof 이벤트에당첨됐다. <화양연화>와의 첫 만남이자 극장에서왕가위 영화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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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감독의 7번째 영화 <화양연화>는그 전까지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 영화의 주인공차우(양조위, 극장상영자막의 이름 표기를 따름)와 수리첸(장만옥)은 <중경삼림>이나 <동사서독>의주인공처럼 쿨하지 않다. 불륜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감정에 죄책감을 가지는 도덕주의자들이<화양연화>의 주인공이다. 그래서일까, 이전 영화들의 주인공처럼 격렬하게 사랑을 표현하지도않고, 이렇다 할 애정씬이라는 것도 없다. 영화는 차근차근시간을 쌓아가며 그들의 애정행각이 아닌 감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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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간 이어진 영화의촬영은 크리스토퍼 도일, 마크 리 핑빙, 관본량 세 촬영감독이돌아가면서 맡았다. 어떤 효과를 노렸다기 보단 길게 이어진 촬영기간 덕분에 세 감독이 시간이 날 때마다돌아가며 촬영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왕가위 감독은 촬영기간 내내 시나리오를 수정했고, 완성된 영화는 기존의 영화와는 매우 다른 영화가 되었다고 한다. 오랜시간 동안 촬영된 결과물은 같은 공간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는 차우와 수리첸의 모습을 담는다. 물리적으로긴 시간을 담아내어 퍼즐조각을 모아 맞추듯 편집해낸 결과물이 <화양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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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주인공이집을 구하러 온 장면에서부터 같은 날 이사하게 되는 장면, 옆집 이웃으로써 대면하게 되는 장면, 국수를 사러 가는 수리첸과 퇴근하는 차오가 마주치는 장면 들을 보여준다. 짧은페이드인-아웃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오랜 촬영기간 동안 찍어낸 수많은 장면들을 거르고 걸러 가장 정제된장면들처럼 보인다. 이렇다 할 애정고백도, 터치도, 대화도 없으면서 관객들은 둘 사이의 감정을 캐치하게 된다. 식사하는수리첸의 그릇에 소스를 담아주는 차우의 모습을 세심하게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진해진다. 냇 킹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가 흘러나오며 등장하는슬로우 모션은 감정을 우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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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피는 남편의아내와 바람을 피는 아내의 남편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묘하다. 스스로의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는도덕주의자 캐릭터들이 불륜을 저지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고, 자연스러운 이별의 순간까지 제공한다. 씁쓸한 영화의 마무리에 여운을 더한다. 끝을 알 수 있는 감정이었기에차우와 수리첸의 감정은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미리 이별연습을 하던 둘의감정은 무너지고 만다. 에필로그에서, 오랜만에 아파트를 다시찾아 눈물을 보이는 수리첸과 앙코르와트의 벽 틈새에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봉인하는 차우의 모습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영화의 제목인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한 때를 의미한다. 영화 속 차우와 수리첸의 (약 1년정도로 추청되는)한 때는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일까? 결국이별할 것을 직감하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각자의 배우자와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어지는 그들의감정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 순간을 화양연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1960년대의 홍콩을 그린 왕가위감독은, 단지 두 주인공의 화양연화뿐만이 아니라 홍콩의 화양연화가 언제였는지, 그때를 화양연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두 주인공에게 깊숙이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 거리를 둔 촬영은 왕가위 감독 자신과 홍콩 사이의 감정을 되돌아 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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