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참정권을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
100년이 지났다. 1918년 영국에선 30세 이상의 특정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1924년에 모든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사라 가브론의 신작 <서프러제트>는 이런 여성의 투표권을 따내기 위한 20세기 초 여성들의 투쟁을 그린다. 당시 운동가 중 가장 유명했고, 영화에선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가 이긴다(My Own Way)』를 원작으로 한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하지만, 영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여성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의 뒤를 따라간다. 남편 소니(벤 휘쇼)와 함께 공장에서 일하며 아들 하나를 키우는 모드는 우연히 “Vote for Women”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서프러제트들을 보게 된다. 이후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바이올렛(앤 마리 더프)의 권유로 여성 투표권 관련 청문회에 증언을 하게 된다. 그 날 이후 적극적으로 여성 투표권 운동에 참여하게 된 모드는 경찰들의 미행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디스(헬레나 본햄 카터)등과 운동을 이어간다.
굉장히 정직한 영화이다. 반대로 말하면 무개성의 지루한 연출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서프러제트’라는 소재를 담아내기엔 이런 담백한 연출이 어울린다. 모드 와츠라는 인물이 어떻게 서프러제트 운동을 접하고,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으며, 어떤 일들을 해냈는지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러면서 세탁공장에서 착취당하고, 남편 소니의 소유물처럼 살아가는 모드의 감정에 관객들이 충분히 젖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모드 와츠가 에멀린 팽크허스트 같은 달변가는 아니기에 화려한 비유를 곁들인 연설을 하진 못한다. 하지만 포장하지 않은 모드의 말과 행동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캐리 멀리건의 힘이다.
단출한 연출에 힘이 실린 것은 캐리 멀리건을 비롯한 배우들의 공이다. 영화를 이끌어 간 캐리 멀리건은 그 표정만으로도 관객들을 설득시키는 힘이 있다. 모드가 뱉는 대사들이 세련되지 못하고 단순한 외침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관객들을 차별 가득한 20세기 초의 영국으로 불러온다. 극중 모드가 당한 착취와 차별이 캐리 멀리건의 몸을 통해 고발된다. 에멀린 팽크하우스 역을 맡아 3~5분 정도로 아주 짧게 등장하는 메릴 스트립은 자신이 왜 메릴 스트립인지 증명하는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모드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영화이기에, 잠적한 서프러제트의 리더가 짧게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짧고 굵은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외의 헬레나 본햄 카터를 비롯한 서프러제트 단원들의 연기들도 흠 잡을 데 없이 좋았다.
영화 자체만 두면 딱히 흠 잡을 데 없는 영화이지만, <서프러제트>는 의외의 논란에 휩싸였다. 바로 화이트 워싱 논란이다. 화이트 워싱은 원래 백인이 아닌 인물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을 일컫는다. 할리우드에도 충분히 백인이 아닌 인종의 배우들이 많아졌는데, 유색인종인 인물에 백인을 캐스팅 하는 것은 인종차별적인 발상이다. 특히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서프러제트>는 더 거세게 논란이 일었다. 영화 속에선 오로지 백인만이 등장하고, 당시 영국에 있었던 인도인들이나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 후에 영국으로 넘어온 인도 여성들이 있었고, 그들이 서프러제트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들에 대한 언급이나 잠깐의 등장도 없다는 점은 아쉽다.
영화의 마지막, 여러 국가들이 언제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받았는지를 자막으로 보여준다. 100여 년 전에 서프러제트 등의 활동으로 여성의 투표권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자막은 120년 전에서부터 바로 작년인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투표권 인정까지의 역사를 훑어준다. 그 말은 아직도 여성들이 한 명의 국민으로써 제대로 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국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투표권과 참정권이 법과 제도를 통해 인정받은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특히 지금 한국의 분위기가 <서프러제트>가 다루고 있는 20세기 초반 영국의 모습과 얼마나 다르지 않은지 고민해보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법과 제도를 통해 형식적인 평등을 이뤄냈을 뿐이다. 사실 그 법과 제도마저도 완전히 평등하진 않지만.
엔딩크레딧과 함께 뿌옇게 번진 빨간색과 파란색 불빛이 번갈아가며 스크린에 비춰진다. 마치 호송되는 차량의 습기가 가득 찬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운동을 전개하다 잡혀간 서프러제트들의 시선이 이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