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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17. 2020

억압과 자유의 모순 사이를 가로질러 자신에게로 탈주하기

<아워 바디> 한가람 2019

*스포일러 포함


 <아워 바디>는 시놉시스나 예고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괴팍한 방식으로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6년 동안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자영(최희서)은 시험 당일 시험장에 가지 않는다. 대신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현주(안지혜)를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다. 달리기는 자영을 변화시킨다. 6년 간의 수험생활 동안 라면을 주식으로 삼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간혹 편의점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애인과의 섹스가 운동의 전부였던 자영의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영은 학교에서 ‘젓가락’이라 불린다는 중학생 동생 아영(이재인)의 다리나 6~7년 간의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현주의 몸을 바라본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만진다.

 하지만 <아워 바디>는 단순히 운동을 통함 몸의 변화나 건강하기에 아름다운 육체와 같은 긍정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다. 달리는 자영의 몸은 점점 이상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아름다운 몸이 되어가지만, 동시에 사회가 요구하는 신체에서 벗어난다. 영화가 시작하고 처음 등장하는 소리와 이미지는 자영이 보고 있는 인터넷 강의 소리, 필기와 메모지로 가득한 자영의 책과 책상이다. 자영의 시선은 행정고시라는 제도와 명문대를 졸업했음에도 시험에 6년간 투신하게 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억압된다. 기계 비평, 미디어비평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태훈은 [노량진 학습 유충의 테크노스케이프]에서 공무원 시험 시장이 수많은 ‘공부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으며, 초등학교부터 취업까지 시험 없는 사회를 살아보지 못한 한국인들의 눈 앞에 놓인 것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인터넷 강의, 각종 학습 기계 등이 구성하는 테크노스케이프라고 지적한다. 글의 제목인 ‘학습 유충’은 독방처럼 구성된 학습 기계를 본 루이스 멈포드가 경멸적으로 사용한 단어로, 임태훈은 학습 유충의 아이디어가 다양한 학습 기계를 통해 한국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자영은 학습 유충이다. 그는 동네에서 우연히 현주를 마주친 이후에야 학습 유충의 풍경 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그 시선에 조응하는 타인의 시선, 가령 행정고시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자영에게 반복적으로 “사람 구실을 해라”라고 말하는 엄마(김정영)이나 모두가 취업에 목매는 상황에서 인턴 자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자영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친구 민지(노수산나)는 자영을 다시 시험의 굴레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그것이 행정고시가 됐든, 인턴 과제에서 면접에 이르는 취업 시험이 됐든 자영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습 유충의 자리다. 이러한 방식으로 몸과 시선을 규제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부터 걸음걸이를 통제하고 체조를 통해 훈육되는 일본의 근대적 신체나 한국 군사정권에서 시작된 근대적 기계-신체까지 이어진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다만 이 역사의 과정은 남성의 신체와 더욱 큰 연관을 지닌다. 스파르타, 20세기 일본, 한국 군사정권은 유사한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보편적 신체에서 제외했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여성의 신체는 성과 재생산의 영역에 구속된다. 때문에 <아워 바디> 속 자영의 신체는 신체를 통제함으로써 획득되는 국가적, 사회적 규율 밖으로 탈출함과 동시에 여성의 신체에 부여된 성과 재생산의 구속을 벗어난다.

 95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세 차례 등장하는 자영의 섹스는 언뜻 후자를 부정하는 것 같다. 전애인과의 마지막 섹스에서 상의를 입고 있던 자영이 달리기 동호회의 동생과 나누는 섹스에선 전라상태라는 점은 운동을 통해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신체에 가까워진 자영의 몸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가람 감독은 두 섹스 장면을 조금 다르게 담아낸다. 첫 번째 섹스에서 남성인 자영의 애인은 자영의 몸을 만진다. 두 번째 섹스에선 자영이 남성인 동호회 동생의 몸을 만진다. 자영은 대상에서 대상화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학습의 풍경에서 벗어난 초점 없는 눈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첫 번째 섹스와는 다르게 두 번째 섹스에서는 적극적으로 상대의 몸을 관찰한다. 몸을 관찰하는 자영의 눈은 동생 아영이나 현주의 몸을 바라보던 시선의 연장이다. 이 시선에는 기묘하게도 성적인 뉘앙스가 제거되어 있다. 자영이 원하는 신체는 아름다운 성적 대상이라기 보단 규율에서 벗어날 수 있을 법한 신체다. 출판사에서 일하며 소설을 쓰는 현주의 달리는 신체는 자영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가장 논란이 된 정 부장(장준휘)과의 섹스는 일종의 재확인이다.

 자영은 섹스 판타지가 무엇인지 묻는 현주에게 “값비싼 고급 호텔에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온종일 머무는 것”이라 대답한다. 반면 현주는 “나이 많은 남자”라는 명확한 대상을 지칭한다. 현주는 영화 중반 즈음 달리기 사고로 사망한다. 자영이 정 부장과 나누는 섹스는 자영의 성적 판타지를 대행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과정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섹스를 했다는 정황만이 영화에 등장한다. 정 부장의 신체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신체는 자영이 추구하던 것과 다르다. 한국의 시험 사회를 차례로 거친 정 부장의 몸은 규율과 남성 권력으로 만들어졌다. 반면 자영이 추구하던 것은 규율에서 벗어난, 그리고 성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모순 사이에 위치해 있다. “날씬해진 것 같다”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좋다”처럼 운동을 통해 변화한 자영의 신체를 두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하는 말은 규율 안으로 자영의 신체를 밀어 넣는다. 반면 자영의 두 번째 섹스와 세 번째 섹스는 규율과 상관없거나 그밖에 위치해 있다. 자영은 섹스를 통해 타인의 몸과 자신의 몸을 확인한다. 그것은 현주와의 달리기를 통해 촉발된 규율 밖의 신체와 시선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정 부장과의 섹스는 그 확인 과정의 마지막과 같다. 소문이 퍼지면서 회사 사람들은 자영의 섹스가 취업을 위한 것이라는 둥의 말을 이어간다. 그것은 규율과 구속의 방식으로 자영의 신체를 통제하려는 압력이다. 하지만 자영의 입장에서, 그것은 스포츠용 언더웨어만 입은 채 아파트 복도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현주의 행위와 유사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신체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영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영은 현주가 죽은 뒤에 꾸는 꿈에서 나체로 나타난 현주를 끌어안는다. 이것은 자영과 현주 사이의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기보단, 자영이 상정한 이상적 신체를 감각하는 장면에 가깝다. 세 번의 섹스 장면은 자영의 성욕보다 자신의 신체를 확인하는 다양한 방식에 가깝다. 학습 유충의 풍경에서 벗어난 자영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몸을 변화시키고, 몸을 규율 밖으로 탈출시킨다. 세 번의 섹스는 그 탈출이 그것을 통해 벌어질 수 없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현주와 성애적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현주의 몸을 규율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자영의 시선을 반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자영은 회사를 무단결근하고 자신이 성적 판타지라 언급했던 고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는 혼자다. 그의 옆에는 남성도 여성도 없다. 그는 라면을 먹어왔던 수험시절이나 규율화된 인간관계 속에서 제대로 음식의 맛도 느끼지 못했던 알바-인턴 생활과는 다르게, 룸서비스로 주문한 수제버거를 매우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그는 커튼을 열고 햇빛을 받으며 자위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자영의 신체는 규율과 구속 밖에 도착한다. 타인과의 섹스는 자영에게 성애적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영은 에이로맨틱-무성애 스펙트럼 내의 인물일 것이다. 섹스는 신체를 확인하는 행위였지, 애정이나 성욕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영은 현주의 뒤를 따라 달린다. 흔들리는 현주의 포니테일 머리가 자영의 시선에 들어온다. 자영은 그 머리를 따라 달린다. 어쩌면 <아워 바디>는 <현기증>에 기묘한 오마주를 바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기증>의 스코티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머리를 묶은 여성을 따라간다. <아워 바디>의 자영은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현주를 따라간다. <현기증>은 그것을 명백히 성적 은유로 사용하며, 소용돌이 모양은 스코티의 혼란스러운 여정을 요약한다. 반면 <아워 바디> 속 현주의 머리는 사방으로 흩날린다. 현주의 달리기에 따라 흔들리는 묶인 머리는 묶여 있음과 사방으로 탈주함이라는 두 은유로써 자영의 행보를 요약한다. 스코티의 리비도적 여정은 자영의 탈규율적 여정으로 변한다. 성욕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섹스의 중심에 놓지 않는 자영은 여성의 섹스에 부여된 여러 관념들을 배제하고, 그것을 행하는 신체를 강조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아워 바디>의 대범함은 여기에 있다. 강요된 시선을 자신의 몸으로 돌리고, 신체를 둘러싼 억압과 자유의 모순 사이를 가로질러 자신에게로 탈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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